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비극적인 권총자살로 막을 내린 너바나 역사(下)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스쿨오브락 - 152] 지난 번 글에서 너바나의 대박 앨범 '네버마인드(Nevermind)'의 성공과 그 함의까지 전한 바 있다(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0/05/28345/). 이제 그들의 마지막에 대해 전할 차례다.

너바나는 네버마인드 앨범을 통해 록 음악계 역사를 바꾸는 쾌거를 일궜다. 그들은 당대 최고 스타로 등극했으며, 모두가 그들을 칭송했다. 평론가들도 갈수록 상업화에 찌드는 메탈신을 비판하다가 간만에 날것의 느낌을 주는 밴드가 차트를 점령하는 이 사태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당연히 까내리는 사람도 있었다. 무조건 까고 보는 것이 평론의 ABC 아니던가…) 따라서 너바나는 대중과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는 몇 안 되는 밴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성공의 계단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밴드가 느끼는 불안감도 더욱 커져갔다. 커트 코베인의 불안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성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코베인은 뼛속까지 패배주의에 찌든 인물이었다. 주류와 섞이고 싶지 않았고, "내가 그 유명한 록스타요" 하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체질에 안 맞았다. 하지만 록계 즐비한 동료들 사이에서 너바나를 달갑지 않아 하는 시선도 슬슬 퍼져나갔다. 널리 알려진 너바나와 건즈앤로지스 간 불화는 이런 분위기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였다.(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19/10/26961/) 물론 불화는 너바나 스스로가 자초한 측면도 있다. 요약하자면 그들의 멘탈은 여전히 뒷골목 클럽을 전전하며 마리화나나 피워대는 찌질이에 불과했는데, 대중은 그들을 '왕이 내려왔다'며 칭송하고, 동료들은 은근히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상황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유리 멘탈에 가까웠던 코베인으로서는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봐서는 비극의 전조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1992년 코베인은 연인인 코트니 러브와 식을 올린다. MTV 뮤직 어워드에서 트로피를 여럿 수집했고, 때마침 딸도 출산했다. 그리고 새 앨범도 내놓았다. 1993년 2월 일이다. 그들의 마지막 공식 앨범인 '인 유테로(In Utero)'다. 이 앨범에는 복잡해진 코베인의 심경이 드러나 있다. 일단 제목부터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직역하면 '자궁 속으로'다. 자궁은 새 생명을 잉태하는 가장 근본의 장소다. 너바나는 '네버마인드'가 주는 성공에서 벗어나 그들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들이 말하는 근원이란 거친 질감의 사운드, 단순한 코드, 자기 파괴적인 메시지,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내려놓음'이었다. 그게 너바나였기 때문이다.

매일경제

사진=flickr


그래서 그들은 네버마인드 시절의 깔끔한 사운드를 배제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지저분한 사운드를 녹음했다. 하지만 결과물은 네버마인드와 완전히 극단에 있는 너무나도 날것이었다. 이대로라면 거의 엔지니어링이 배제된 아마추어 녹음 수준이었다. 그래서 결국 게펜 레코드는 약간의 손을 볼 수밖에 없었다. 정식 앨범이 공연을 있는 그대로 녹음한 라이브 앨범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코베인은 전문가의 손을 거치면 또 사운드가 지나치게 정제될까 봐 걱정했고, 그의 예측대로 마지막 앨범 역시 코베인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앨범에 실린 '레이프 미(Rape Me)'는 아마도 코베인의 심경이 그대로 가사로 녹았을 확률이 높다.

Rape me(날 범해줘)
Rape me, my friend(날 범해줘 내 친구여)
Rape me(날 범해줘)
Rape me again(날 또 한 번 범해줘)

I'm not the only one(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No, I'm not the only one(아니야, 난 유일무이한 사람이 아니야)

Hate me(나를 증오해줘)
Do it and do it again(또 또 그렇게 해줘)
Waste me(날 아무렇게나 해줘)
Taste me, my friend(날 맛봐줘, 내 친구여)

I'm not the only one(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No, I'm not the only one(아니야, 난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고)


아마도 이 노래에는 유명세에 시달리는 코베인의 심경이 그대로 담겨 있을 것이다. 그는 일상생활을 집요하게 캐내는 파파라치들에게 신물이 나 있었다. 그를 가십으로 바라보는 타블로이드 기사는 염증이었다. 여러모로 그의 심성은 유명인의 삶과는 적잖은 거리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리화나를 피우며 부모의 빈자리를 채웠던 그는 차츰 헤로인에 의지하는 나날이 더 많아졌다. 그의 역사적 공연 중 하나로 꼽히는 MTV 언플러그드 공연은 사실 마약을 비롯한 여러 문제 중 하나로 성사 여부를 쉽게 결정하기 힘들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다. ’인 유테로(In Utero)’ 앨범은 전작에 이어 또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거머쥐었다. 너바나는 누가 뭐래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밴드 축에 들었다. 하지만 1994년 코베인은 '그런지는 죽었다(Grunge is dead)’고 발언하며 불안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미 세상은 너바나를 그런지의 왕으로 취급하는 분위기였다. 코베인 입장에서 그런지를 죽이려면 너바나가 사라져야 했다. 그는 자기모순에 빠진 채로 어쩔줄 몰라했다.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부담감이 그를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매일경제

커트 코베인 /사진=flic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다 사건이 터지게 된다. 1994년 4월 코베인은 마약에 쩐 상태로 자택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죽은 채로 발견된다. 경찰은 하나밖에 없는 문이 안에서 잠긴 점과 총에서 타인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은 점을 들어 자살 판정을 내렸다. 코베인이 유서를 남긴 것도 자살을 추정하는 유력한 단서가 됐다.

하지만 한순간에 영웅을 잃은 대중은 그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각종 음모론이 판을 쳤다. 그가 자살한 총에서 코베인의 지문까지 발견되지 않자 누군가 그를 죽인 후 지문을 닦은 거란 유력한 주장이 나왔다. 하나뿐이라고 알려졌던 문은 실제로 두 개였다. 그리고 코베인 몸속에서 발견된 헤로인은 치사량의 세 배쯤 됐다. 이 정도면 정신이 오락가락해 스스로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자살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추측도 나왔다. 그리고 대중이 주목한 범인은 그의 아내 커트니 러브(Courtney Love)였다. 왜냐하면 코베인과 그 무렵 관계가 좋지않아 이혼 얘기도 나왔고, 그가 결혼할 때 '이혼 시 재산 분할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베인의 재산을 탐낸 아내가 그를 죽이고 재산을 가로챘다는 의심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커트니 러브 역시 코베인과 마찬가지로 마약 중독자였다. 임신 중에 헤로인에 노출돼 아이가 기형이 될까 두려워 낙태를 고민했을 정도다) 또 다른 관점에서 코베인이 인기를 감당하지 못해 은퇴할 거란 얘기를 입버릇처럼 하자 소속사 측에서 그를 죽이고 코베인을 '박제된 영웅'으로 만들어 두고두고 그를 활용하기 위해 그를 살해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지만 사실로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의 유일한 자식인 프랜시스 코베인(Frances Cobain)이 아버지의 부재를 그리워했으며 어머니인 커트니 러브와 사이가 썩 좋진 않았지만 때로는 화해하고 자주 시간을 함께했다는 정도다.

코베인의 사망 이후 너바나 음악을 흉내낸 후배 밴드가 하염없이 쏟아졌다. 어떤 밴드는 너바나의 기타 리프를 닮았으며, 누군가는 보컬이 코베인 목소리와 비슷했고, 누군가는 멜로디를 쏙 빼다 닮은 듯 유사하게 곡을 만들었다. 그러나 너바나 이후 너바나를 흉내내 너바나 자리를 대체한 밴드는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너바나는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한 세기의 장을 닫은 셈이 됐다. 그리고 너바나는 전설이 되었다.

물론 너바나를 폄하하는 일부 사람들은 코베인의 죽음이 너바나를 절대 불멸의 무엇으로 만들었다며 불편한 시선을 내비치기도 한다. 달랑 정규 앨범 3개를 낸 밴드에 불과하다며 까내리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그 3개 앨범 중 2개가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는 역사는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빌보드 1위를 원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됐다는 배경조차 쉽게 희석되지 않을 것이다.

너바나를 다룬 첫 글(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0/05/28266/)에서도 언급했지만 너바나가 내건 패배주의는 시대를 관통하는 힘이 있다. 지금이야 힙합에 밀려 록이 구닥다리 취급을 받고 있지만, 청년들이 힙합보다 록을 더 많이 듣는 시대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힙합을 듣던 지금의 청년이 기성세대가 되는 시점이 바로 그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때쯤 너바나 음악은 시대를 통째로 역주행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인류가 '시대를 앞서간 음악'으로 칭송하며 불멸의 생명력을 이어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를 연 음악'을 만든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테니.

[홍장원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