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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나랏돈으로 개발하고 해외 환자만 혜택…분통터질 원격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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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의료 '코리아 아이러니']하. 울면서 한국 떠나는 기업들

중앙일보

웨어러블 헬스케어 업체인 헬스리안의 노태환 대표(오른쪽)가 29일 자체 개발한 세계 최경량 패치형 심전도계(WearECG12)를 선보이고 있다. 제품 무게는 30g으로 몸에 붙이면 실시간으로 심전도 측정이 가능하다. 측정 시간은 27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 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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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소재 웨어러블 헬스케어 업체인 헬스리안은 최근 실시간 심전도계(WearECG12) 개발에 성공했다. 심전도계는 가로 46㎜, 세로 35.6㎜ 무게는 30g이다. 파스와 비슷한 전극 패치와 결합해 몸에 붙이면 실시간으로 심장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장비를 몸에 붙이고, 심전도를 측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7초. 헬스리안은 자체 개발한 체지방 분석 반도체도 심전도기와 결합한다는 계획이다.

체지방 분석 반도체와 심전도기 개발에 들인 연구비는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국가연구개발사업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덕이다. 약 30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하지만, 이 심전도계는 국내에선 서비스가 불가능하다. 무선ㆍ원격으로 심장박동 수 같은 의료 데이터를 의료진과 환자가 주고받는 건 현행 의료법 등이 금하고 있는 ‘원격의료’ 행위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관련 데이터는 의료진과 의료진 사이에서만 전송이 가능하다. 미국 등에선 이미 환자-의사 간 데이터 전송을 허용한다.

때문에 헬스리안은 해외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국내만 바라봐선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서다. 이는 이 회사 노태환 대표(34ㆍ사진)가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 가전 전시회(CES)에 다녀온 이유이기도 하다. 노 대표는 29일 “나랏돈으로 기술을 만들어 놓고도, 정작 비즈니스는 해외에서 먼저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답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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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어러블 헬스케어 업체인 헬스리안의 노태환 대표(오른쪽)가 29일 자체 개발한 세계 최경량 패치형 심전도계(WearECG12)를 선보이고 있다 . 제품 무게는 30g으로 몸에 붙이면 실시간으로 심전도 측정이 가능하다. 측정 시간은 27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 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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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수준의 원격의료 기술을 개발했지만, 국내에서는 관련 비즈니스를 할 수 없어 한국을 떠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의료법 개정안은 10년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홈그라운드 떠나는 한국 원격의료 기업들



뇌졸중 등으로 인한 마비 환자 등으로 인한 마비 환자용 재활 기기를 개발한 네오펙트 역시 일찌감치 시선을 해외로 돌렸다. 현재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30여 개국에 진출해 약 40만 명의 이용자를 확보했다.

의료기기 측정 정보를 수집해 의료진과 공유하는 원격의료 시스템인 '하이 케어 허브'를 개발한 인성정보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 정부 등과 공급 계약을 맺고 관련 제품 납품에 성공했지만, 정작 국내 원격의료 시장에서는 규제에 막혀 일부 시범 사업만 하는 데 그치고 있다.

네이버의 일본 의료 전문 자회사인 라인헬스케어 역시 지난해부터 일본에서 원격의료 서비스를 시작했다. 최근에는 일본 정부가 라인헬스케어의 원격의료 서비스를 자국민 전체에게 무료로 제공하기로 한 바 있다. 비용은 전액 일본 정부가 부담한다. 하지만, 이 회사 역시 국내에서는 아직 서비스를 시작조차 못 하고 있다.



국내 원격의료 시장 규모조차 파악 안 돼



지난 2018년 아산나눔재단과 구글 스타트업캠퍼스 등은 ‘디지털 헬스케어’ 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100대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중 63곳은 국내에서는 규제 탓에 사업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원격의료를 놓고 미래 신(新)산업이라는 칭송만 이어질 뿐 아직 국내 업체들은 눈을 뜨고 해외 경쟁자들의 활약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내수를 통해 체력을 키우고, 이 힘을 바탕으로 해외로 나가는 스타트업이나 기술 기업의 일반적인 성장 경로와는 정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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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원격의료 시장규모.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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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경제인연합회와 독일 시장조사기관인 스태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글로벌 원격의료 시장 규모는 305억 달러(약 37조1100억원)에 이른다. 2021년에는 412억 달러(약 50조1600억원) 규모로 커질 것이란 전망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관련 시장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원격의료 활성화의 첫 단추는 환자 관련 정보 등 의료 데이터의 활용이다. 이와 관련 정태경 차의과대학교 데이터경영학과 교수는 “의료 데이터는 원격의료 산업에 있어 혈액 같은 존재라, 의료 데이터가 돌면 자연스레 관련 산업의 성장에 필요한 여건도 형성될 것”이라며 “지금같은 규제 아래에선 IBM의 인공지능 컴퓨터인 왓슨(Watson)처럼 의료 빅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낸 사례는 나올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의료 데이터 활용부터 풀어라



그나마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면서 정부를 중심으로 원격진료 허용에 대해 긍정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물론 단번에 모든 형태의 원격진료를 허용하기는 어렵다.

전문가들은 원격의료가 성공하기 위해선 진료 수준에 따른 단계별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처음에는 원격진료의 낮은 수준에서부터 접근해야 한다”며 “진료나 의료 단계가 아니라 (만성 질환자에 대한) 모니터링 수준의 원격 데이터 공유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이젠 이해 관계자 갈등 조정이 아닌 국민 편익 증진 차원에서 원격의료 제도를 풀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중앙일보의 서면 질의에 외국 전문가들이 한 답변이다. 미국의 원격의료 관련 시민단체(NGO)인 연계의료정책센터(CCHP)의 메이 와 퀑 최고경영자(CEO)는 “미국의 경우 원격의료 도입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의료진을 설득한 것은 아니었고, 메디케어(Medicareㆍ65세 이상 노인 위한 의료보험 제도)나 메디케이드(Medicaidㆍ저소득층 위한 의료보험 제도) 같은 정책 변화를 바탕으로 의료진이 원격의료 서비스를 통해서도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며 “누구나 익숙한 방식에서 일하고 싶어하겠지만, 의사들도 이젠 (원격의료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영국의 대표 원격의료 서비스 기업인 푸쉬 닥터(Push Doctor)의 와이즈 샤이프타 CEO 역시 “원격의료는 환자와 의료진 모두에게 효율성과 편리성을 높여줬다”며 “원격의료는 환자뿐 아니라 대면 진료를 제공하는 의료 종사자들의 부담도 줄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기ㆍ강기헌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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