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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머물렀던 푸른 눈의 외국군 포로들…경성연합군 포로수용터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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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 경성 연합군 포로수용소 포로들의 모습. 용산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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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청파동 신광여중여고가 과거 푸른눈의 외국인 포로 수용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포로수용지를 둘러쌌던 철망과 벽돌 한 장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뀐 지 오래기 때문이다.

서울 용산구는 27일 ‘잊힌 역사의 현장, 경성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를 소개했다.

용산구 청파동3가 100, 현 신광여중고 부지는 아시아태평양전쟁(1941~1945)이 발발했던 80년 전 식민지 조선에 설치된 외국인 포로수용지였다.

경성 연합군 포로수용소는 아태전쟁 시기 말레이(싱가포르) 전투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된 연합군 병력을 수감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시설이었다. 개설일자는 1942년 9월 25일. 방직공장인 ‘이와무라제사소’의 4층짜리 벽돌건물을 일제는 재활용해 수용소로 삼았다.

왜 일본은 백인 포로수용소를 이곳에 설치했던 것일까. 이유는 백인 포로를 일종의 방패막이로 삼아 인근의 일본 군사·철도기지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수용소 바로 옆에는 용산 일본군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다.

전투기가 일본군 사령부를 공격할 경우 백인 포로수용소도 함께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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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5년 용산에 있었던 경성 연합군 포로수용소 전경. 용산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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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인들을 상대로 한 선전효과도 있었다. 일제는 한반도 내 경성과 인천, 흥남 3곳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자신들의 ‘우월성’을 조선인들에게 과시하고, 공포심을 유발할 목적이었다.

1942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약 3년간 영국, 호주군 포로 수백여 명이 경성 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포로들은 낮에는 인근 일본군 육군창고(현재의 캠프킴 부지), 경성역(현재의 서울역), 한강다리 등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해방 후 포로들이 풀려나자 경성 수용소는 학교로 재활용됐다. 1946년 신광기예초급중학교가 이곳에 들어섰다. 신광여중고의 전신이다. 학교 건물 일부에 남아있던 수용소 건물 역시 건물 노후화 등의 문제로 2011년 철거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은 “전에 신광여중고 앞에서 선조들의 흔적을 찾아 온 외국인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면서 “지금은 벽돌 하나 남아있지 않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말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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