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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아침 햇발] 사이버 ‘강간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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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사’ 조주빈이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던 25일, 텔레그램 성착취자의 강력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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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영희 ㅣ 논설위원

얼굴을 드러낸 조주빈보다 마이크를 들이민 여성 기자들이 왜 더 눈에 들어왔을까. 대답 없는 ‘박사’를 향해 그들은 끈질기게 “피해자에 죄책감 느끼지 않습니까”를 낮은 목소리로 반복했다.

‘엔(n)번방’ 사건을 둘러싼 정치권과 수사기관 움직임이 숨가쁘다. 반가운 마음이 들지만 씁쓸함도 있다. 그동안 정말 몰랐단 말인가. 설리와 구하라가 떠났다. 연인원 30만명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고 혜화역 시위에 나섰다. 2015년 소라넷아웃 프로젝트부터 디지털성범죄아웃 DSO,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추적단 불꽃과 텔레그램 성착취신고 프로젝트 리셋(ReSET)을 비롯한 수많은 평범한 여성들이 충혈된 눈으로 우울증 약을 삼켜가며 성착취 영상을 찾아내 삭제 요청을 하고 신고했다.

모두가 외면했다는 말이 아니다. 수사 성과도 있었다. 그런데 끝나지 않는 두더지잡기 게임 같았다. 소라넷을 잡고 나니 웹하드 카르텔이 지적됐고, 양진호가 구속되니 정준영의 단톡방이 나오고, 웰컴투비디오가 있더니 텔레그램이 번졌다.

플랫폼은 진화한다. 수초~48시간 내 대화 자동삭제나 수정이 가능한 텔레그램에선 화면 갈무리(캡처)조차 불가능(안드로이드)하거나 상대방에게 알림(iOS)이 간다. 한 채널의 자료는 ‘전달’ 기능을 통해 쉽게 다른 채널로 통째 넘어간다. 외국 가상번호를 이용한 가입법도 친절히 안내된다. 정준영 단톡방이 오프라인 성범죄를 온라인에 옮겼다면 텔레그램은 “온라인이 현실 공간 성범죄로, 다시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양상”(‘리셋’ 보고서)이다. 일베나 소라넷에 비하면 대규모 인원의 실시간 피드백이 가능한 특성이 더해져, 생산-유포-소비-확산의 경계는 한층 모호해졌다. 피해자가 ‘노예’로 강제 초대된 방에서 피해자에게 직접 더 엽기적인 사진을 요구하거나 피해자 집 근처에 가 인증샷을 올리는 회원들도 있었다.

거친 표현이지만, 여성 하나를 광장에 세운 채 조리돌림하듯 추행하거나 강간하는 집단성폭력과 얼마나 다른가. 오프라인 성범죄 피해자의 #미투와 또 달리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를 밝히는 순간 성착취 영상이 ‘음란물’과 ‘포르노’로 무한대로 소비되어버린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대한민국이 강간의 왕국이냐”며 킥을 날렸지만 사이버 세계에서 우리는 이미 ‘강간의 왕국’을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1020 남성 집단문화를 개탄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박사방 ‘입장료’가 최고 200만원이었음을 생각하면 어떤 세대·계층이 포함됐을지 모를 일이다. 그들은 피해 영상을 ‘스티커’(이모티콘)로 만들어 낄낄대며 소비했다. 여성을 성적 대상이나 상품으로 여겨온 뿌리 깊은 남성문화와 무관한 일인가. 소수의 ‘극악한 일탈이나 범죄’로만 바라보면 플랫폼을 갈아타고 디지털 성범죄는 또다시 솟아난다.

여성들이 엔번방 사건을 집단성폭력으로 느끼는 공포의 감각을 남성들이 온전히 느낄 순 없다. 그래도 간극은 줄일 수 있다. 디지털 성범죄가 오프라인 성범죄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적어도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 영상에 대해 단호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커졌다. 나아가 성인 피해자 불법 촬영물의 소비·소지도 처벌하는 쪽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사실 법 개정만큼 중요한 게 사법기관의 인식이다. 피해자 스스로 영상을 찍었어도 유포를 협박한 가해자를 강제추행 간접정범으로 인정한 2018년 대법원 판례가 있지만, 검찰이나 법원에선 여전히 신체 접촉, 물리적 협박, 남성 시선의 성적 욕망이 주요 기준이다.

우리 사회에 몇년 전부터 스스로를 ‘헬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젊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늘어난 것은 디지털 성범죄의 급증과 떨어뜨려 볼 수 없다. 생물학적 기준을 절대적 잣대로 보는 그들의 ‘폐쇄성’은 안타깝지만, 이런 ‘지옥’을 둔 채 그들만을 비판할 수 있을까 싶다. 얼마 전 ‘지금 여기서 제동을 걸지 않으면 우리 딸들의 미래는 없다’는 문장을 사설에 쓰며 생각했다. 난 두 아들이 부지불식중에 이런 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세상 또한 끔찍하다. 최근 여성들 중 누군가는 텔레그램 계정에서 조용히 탈퇴하는 지인 남성들에게 ‘혹시’라며 의심을 품게 됐을지 모른다. 의심이 억울한가. 그렇다면 남성들이 더 앞장서길. 함께 이 지옥을 끊어내길.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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