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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다산에게 시대를 묻다](52) 진황 편 권분 | 재난 구제 앞장선 이는 반드시 포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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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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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전국 경제활동이 마비되면서 각계각층에서 구원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다. 기업은 물론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이 기부에 나서고 있다.

기부가 이어지는 분위기는 언제나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기부에도 원칙이 있다. 특정 대상이나 집단에 기부를 강요하는 것은 기부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목민심서 진황 편에 등장하는 ‘권분’은 기부와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경우 조치할 일이 많았다.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권분이었다. 글자 의미대로 ‘나누고 베풀어 살아가기를 권장하는 일’을 말한다. 흉년이 들었을 때 부유한 사람에게 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곡식·재물을 내놓거나 직접 나눠주도록 권하는 일을 뜻한다. 다산은 권분의 유래부터 설명한다.

“권분은 멀리 주(周)나라 때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정치가 타락해 본래의 의도와 실제가 같지 않게 됐으니, 오늘날(조선시대 당시) 권분은 옛날의 권분이 아니다.”

권분이라는 전통적인 빈민 구제정책이 본뜻을 잃고 잘못된 방향으로 바뀌었음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진황 편에 나오는 권분이란

▷부유층에 나눔을 권하는 일

권분이란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돕는 일이라는 대원칙이 있다. 다만 먼 옛날에는 베풀도록 권장했을 뿐 그 이상을 강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산은 조선시대 권분은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당시 권분은 모두 백성 재물을 억지로 빼앗아 나눠주는 것이란 게 다산 생각이었다. 다산은 그런 강제는 권분일 수 없다고 했다.

가장 실효적인 방안은 포상이다. 가령 여유 있는 사람이 흉년 때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 경우 그들에게 포상해주는 일이 적절하다. 강제로 관에 납부하게 해 나눠주는 일은 권분이 아니라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다. 다산은 역대 어진 목민관의 모범적인 권분을 쭉 나열하며 이들의 뜻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다. “중국인인 소보 조열도가 일찍이 월주를 맡았을 때 큰 흉년을 만났다. 그는 고을 부자들을 불러 모아 빈민을 구제할 뜻을 말하며 스스로 허리춤 금대(金帶)를 풀어 마당에 내려놨다. 이에 희사(기쁘게 재물을 베풀어 내놓는 것)하는 사람이 모여들어 온전히 살려낸 사람이 십수만 명이었다.”

자발적으로 돕도록 권하는 일이 권분이란 점을 잘 드러낸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송나라 효종 시절(1163~1173년)에 관할부서에 말했다. ‘호남과 강서에 한재가 들었으니 상을 마련해 곡식을 저장하고 있는 집들에 권유하도록 하십시오. 무릇 쌀을 내어 흉년을 극복하는 것은 의풍(아름다운 풍속)을 숭상하는 일에 속하니 진납(進納·곡식이나 재물을 국가에 자진해서 바치는 일)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구호품을 바쳐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경우 반드시 포상하도록 미리 상금부터 준비하라고 했으니 여기서 권분의 명분이 서는 것이다.

상을 미리 마련해 부자들이 굶는 사람에게 베풀 것을 권하고 많은 재물을 희사한 사람에게 후한 포상을 하는 것이 권분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백성에게 백납(白納·백성에게 베풀지 않고 관에 바치게 하는 것)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르지 않는 백성이 있으면 엄중한 형벌과 사나운 곤장이 마치 도적을 다스림과 같았다. 그러니 한번 흉년을 만나면 부민(富民)이 먼저 곤욕을 치른다.

다산은 권분이라는 아름답고 의로운 빈민 구제책을 오히려 수탈정책 중 하나로 악용하던 행태를 강력히 비판했다.

▶권분을 강제하는 것은 위험

▷백성 수탈에 악용될 소지 있어

다산은 자기가 벼슬하던 정조시대 권분의 모범 사례를 설명하면서 권분과 함께 늑분(勒分)에 대해 언급한다. 순리대로 권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하는 일이 권분이라면, 그와 반대로 억지로 강제해 재물이나 금전을 출연하게 하는 것이 늑분이다.

늑분의 책임은 목민관에게 있으니 엄중히 신칙(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해서 범죄행위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정조 때 제대로 권분을 시행해 많은 빈민이 구제된 경우에는 반드시 벼슬을 내려 금전과 곡식을 출연한 부자에게 후한 포상을 했던 사례를 설명했다.

“흉년에 진휼(흉년을 당한 백성을 도와줌)을 보조하는 일에 자원한 사람을 뽑아 혹 특별히 품계(벼슬)를 내리기도 했다.”

한국도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불우이웃 돕기나 이재민 구호를 위해 위로금이나 의연금(사회적 공익이나 자선을 위해 내는 돈)을 걷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다. 말이 자발적 출연이고 구호금이었지 대부분 ‘준조세’란 말이 나올 정도로 권력의 위협과 공포 때문에 납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산은 또 말한다.

“권분이란 스스로 나눠주도록 권하는 것이다. 권하면 관의 힘이 크게 덜어질 것이다.”

자발적인 출연이어야 의연금이 되고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서로 마음이 편해 가난을 자연스럽게 극복하는 미풍양속이 된다는 뜻이다.

다산이 권분에서 마지막으로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 있다. 나라에서 권분을 시행하라는 명을 내리면 부호는 부호대로 빈자들은 빈자대로 엉뚱한 사건이 발생한다고 했다. 부자는 얼마나 뜯길 것인가에 대해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고, 가난한 사람은 이런 때 한몫 잡아보자는 탐욕스러운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가세가 넉넉한 집안을 요호(饒戶·살림이 넉넉한 집)라고 한다. 요호라고 해서 무조건 권분하라 강요할 수 없다. 요호에도 저마다 사정이 있고 친인척이 있다. 요호의 지인 중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다면 요호 입장에서는 그들을 먼저 구휼하는 것이 맞다. 요호라는 이유로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 관에 바치기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착취일 뿐 권분이 아니다. 재난을 구제하고 흉년을 극복한다는 이유로 강제로 권분하는 일은 당연히 금지해야 한다. 권분이란 명목으로 농간을 부리고 부정부패가 개재되는 일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 기부는 본디 자발적으로 진행될 때 더 큰 의미가 있는 법이다.

매경이코노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 2050호 (2020.03.18~2020.03.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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