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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고재윤 교수의 물의 비밀]물맛과 음식…신 음식 후 물은 단맛·짠 음식 뒤엔 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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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은 무색·무취·무미”라고 말했다. 이후 2000년 가까이 누구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하고 물의 정의를 지켜왔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과학자나 물 전문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물의 정의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1948년 벨기에 헨트 호헤스쿨의 Leo M.L. Nollet 교수는 물의 품질·맛·향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물 분석’ 보고서를 발표했다.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대 Mel Suffet 교수는 ‘물맛 아로마 휠(Aroma Wheel·맛과 향을 표현하는 표)’을 발표했다. 이후 2002년 미국 캘리포니아 수도국 품질 담당 Djanette Khiari 박사가 물의 이취(이상한 냄새)를 감지하는 방법을 고안하며 물의 맛·향을 토대로 물맛 아로마 휠을 체계적으로 구축했다.

연구에 따르면 물속에 칼슘, 규산 등이 많으면 좋은 맛을 내고, 유리탄산(수중의 알칼리 성분이 분해돼 생긴 이산화탄소)이 많으면 청량감을 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마그네슘·황산이온·염소가 많으면 쓴맛이 나고, 나트륨과 칼륨이 많으면 짠맛이 느껴지며, 철·구리·아연·망간은 소량이 함유돼도 금속맛을 낸다. 또한 물속에 총용존고형물(TDS·Total Dissolved Solids·물속에 녹아 있는 고형물의 농도)이 많으면 물맛이 무겁게 느껴지고, 적으면 가볍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물맛을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크게 수원지 환경과 미네랄 함유량, 그리고 물을 마시기 전 먹은 음식을 꼽을 수 있다. 물맛은 물을 마시기 전, 혹은 물과 함께 무엇을 먹었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물과 음식이 서로의 맛에 영향을 미치는 효과 때문이다. 가령 신 음식을 먹은 후 물을 마시면 살짝 단맛이 나고, 짠 음식을 먹은 후에는 미세하게 쓴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또 탄수화물과 단백질은 물이 없으면 그냥 가루일 뿐이지만 적정량의 물이 있을 때 비로소 물성이 만들어지면서 맛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다양한 물을 한 방울 유리컵에 떨어뜨린 후 와인을 따르면 물에 따라 와인맛이 다르게 나타난다. 맥주, 막걸리, 위스키 등을 만들 때 물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숨겨진 물맛을 모르면서 음식맛을 표현한다는 것은 상당한 미식가가 아니고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평소 사람의 혀는 약간 짠맛의 타액에 젖어 있다. 무의식적으로 하루에 삼키는 침의 양은 1ℓ에 달한다. 이런 잠재적인 짠맛에 길들여져 우리가 먹는 음식맛에 영향을 주지만 인식을 못 하고 있을 뿐이다. 음식을 먹기 전 물로 입안 타액을 헹궈내면 미각세포가 재활성화되면서 음식맛을 감지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물을 평가하는 방법은 시각·후각·미각 요소로 측정한다는 측면에서는 와인과 같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다. 와인은 후각이 매우 중요하지만 물은 미각이 80% 이상 평가를 좌우한다. 또 물의 미각 요소는 수원지가 영향을 미치는데, 물의 테루아(취수지의 기후, 토양 등 자연 조건)에 의해 형성된 물속 미네랄 성분에 따라 물의 촉감이 달라진다. 물의 시각 요소는 물이 얼마나 밝고 맑은가, 즉 물의 투명도를 의미한다. 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불순물이 없는지를 확인한다. 물이 든 컵을 흔들어 보면 물 분자(cluster)의 움직임을 통해 무게감을 확일할 수 있다. 물의 후각 요소에서는 와인과 다르게 향이 없는 무취를 이상적이라 본다. 물이 오염될 경우 흙·곰팡이·풀·건초·짚·나무·물고기·야채·꽃 등의 냄새가 나서 심하면 마실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당연히 인체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물을 마실 때 ‘부드럽다, 청량하다, 짠맛이 있다, 단맛이 난다, 비린 맛이 난다’ 등의 느낌을 파악해본다면 물의 비밀을 찾는 재미가 배가되고 건강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매경이코노미

[고재윤 경희대 외식경영학과 교수 겸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 2050호 (2020.03.18~2020.03.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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