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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고교생때 외삼촌이 건네준 조선일보… 동인문학상 심사하며 인연 이어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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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조선일보] [16] 김주영

외삼촌이 세 분 계셨다. 막냇삼촌은 영특함을 알아챈 일본인 선생의 주선으로 일본에서 고학으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러고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6·25전쟁 중에는 부산까지 피란했다가 수복 후 고향으로 돌아와 뚜렷한 직업 없이 소일했다. 남의 수하에서 일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2013년 10월 동인문학상 종신(終身) 심사위원들이 경남 통영시 박경리기념관 인근에 모였다. 왼쪽부터 오정희, 신경숙, 김화영, 이문열 작가. 오른쪽 끝이 소설가 김주영이다. /남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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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소문난 독설가였다. 특히 돈푼깨나 만진다 해서 부정과 비리를 예사로 저지르며 거들먹거리거나, 권력에 빌붙어 좌고우면하는 부류와 마주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날카롭고 비정한 언변으로 창피를 주고 허옇게 닦아세웠다. 그렇게 창피를 당해도, 삼촌이 가졌던 올곧은 정의감과 시대 흐름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정곡을 찌르는 논리의 정연함에 누구도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곱다시 당하곤 하였다.

요절한 막냇삼촌 손에는 언제 보아도 3~4일 정도 발행 날짜가 지난 신문이 들려 있었는데, 시골 구석까지 우편으로 배달되는 조선일보였다. 삼촌은 당신께서 다 읽은 신문들을 버리지 않고 챙겨 두었다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에게 건네주곤 하면서 삼엄한 말로 신문도 교과서만큼 중요한 읽을거리라고 깨우쳐 주곤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시인이 되겠다고 으스댈 적에, 가족 중에서 막냇삼촌만이 유일하게 나를 격려해주었고, 털어도 먼지밖에 없는 무일푼 신세인데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겐 조선일보 하면 외삼촌이 떠오르고 외삼촌 하면 조선일보가 떠오른다.

조선일보가 운영하는 동인문학상 평생 심사위원제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지난 2000년에 참여한 것도 내 나름대로는 그런 속 깊은 인연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인문학상 심사를 시작했을 때 심사위원은 이청준, 박완서, 유종호, 김화영, 이문열, 정과리, 김주영이었다. 그 가운데 두 분(이청준·박완서)은 어느덧 고인이 되었다. 매달 한 번씩 가지는 독회는 너무나 엄격했던 여러 규정 때문에 소화하기 힘들었다. 매달 발표되는 소설 중에서 두세 편을 정독하지 않고는 독회에 참여해도 발언권이 없어 멍하니 앉아 있는 괴로움을 겪었다. 그때의 창피스러움은 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짐작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그달에 발표되는 소설들을 아득바득 찾아 읽어야 했다. 지난 2015년에 스스로 심사위원을 반납하고 물러난 지금까지 가슴속에는 그때의 부담감이 사라지지 않고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관심이 가거나 훌륭한 작가들의 작품을 열독했다는 그때의 뿌듯한 자부심 또한 잊어버릴 수 없다.

[김주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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