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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78년전 당찬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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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민주올레 53]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 탐방 - 서울현충원 여성길③

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 ⓻서울현충원 여성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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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1940. 9. 17) ▲ 1940년 9월 17일의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에는 오광심과 조순옥(3열 오른쪽 ), 김정숙과 지복영(2열 오른쪽) 등 4명의 여성광복군도 함께 참석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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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충칭 자링빈관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이날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에는 오광심과 조순옥, 김정숙과 지복영 등 4명의 여성광복군도 함께 참석했다.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는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한 여성광복군 출신 애국지사 오광심과 신순호, 오희영 등 세 분이 안장돼 있다.

조선혁명군과 광복군의 여전사 오광심(1910-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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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오광심-김학규의 묘 ▲ 애국지사 김학규의 묘 왼편에 ‘배위 오광선 합장’이라고 조그맣게 새겨져 있던 묘비가 애국지사 오광심과 애국지사 김학규가 나란히 새겨진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오광심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날로부터 무려 37년이 지난 2014년의 일이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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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선천 출신의 오광심은 조선혁명군 참모장과 한국광복군 3지대장을 지낸 남편 김학규(1900~1967)와 함께 안장돼 있다.

오광심이 독립운동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은 것은 만주에서 배달학교 교사로 있다 조선혁명당에 가입한 1930년부터였다. 1931년 이후에는 일제의 만주침략이 벌어지자 교직을 접고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처음에는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의 사령부 군수처에서 복무했고, 이어 유격대 활동, 한중연합 항일전에도 참여했다. 이때 오광심이 주로 한 역할은 '비밀연락 업무'였다. 이 지하활동 과정에서 남편 김학규도 만나게 됐다.

1934년 5월에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전권대표로 중국 관내 지역과 연계하는 역할을 남편 김학규와 함께 농부로 감쪽같이 변장해 난징으로 이동했다.

이때에도 난징과 만주를 오가며 비밀연락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오광심과 김학규가 난징에 도착했을 때는 조선혁명군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내는 임무 외에 통일적인 새로운 정당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고, 조선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인독립당 등이 연합하는 민족혁명당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만주의 본부와 긴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김학규는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였다. 몸에 지니고 가다 위험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오광심은 보고서의 내용을 전부 외운 채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만주의 본부에 무사히 도착해 보고서의 내용을 그대로 기술했다.

이후 오광심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1939)와 한국광복군(1940)의 창설 멤버로 참여했다. 한국광복군에서는 선전 업무와 학도병 등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 탈출한 청년 등을 광복군으로 모집하는 초모공작활동을 벌였다.

오광심은 여성들의 광복군 참여를 독려하는 활동을 벌이는 한편, 독립운동 대오에서 여성을 조직하는 활동도 주도했다. 1935년 통일전선운동의 결과 탄생한 민족혁명당에서는 부녀부 차장을 맡았고, 1940년에 창립된 한국독립당의 외곽단체인 한국혁명여성동맹에도 함께했다.

애국지사 김학규의 묘가 애국지사묘역에 처음 조성된 것은 김학규 장군이 서거한 직후인 1967년의 일이었다. 1976년 오광심이 서거하면서 합장해 오광심-김학규의 묘가 됐다. 그런데 오광심은 서거 당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오광심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은 1977년. 오광심이 처음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될 때는 단지 애국지사 김학규의 부인 자격으로 '합장'됐던 것이다.

당시 애국지사 김학규의 묘 왼편에 '배위 오광선 합장'이라고 조그맣게 새겨져 있던 묘비가 애국지사 오광심과 애국지사 김학규가 나란히 새겨진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오광심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날로부터 무려 37년이 지난 2014년의 일이었다.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나선 신순호(1922-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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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신순호-박영준의 묘 ▲ 신순호는 10대의 어린 나이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1939)와 한국광복군(1940)에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모인 신건식-오건해 부부가 안장되어 있는 묘 바로 위편에 남편 박영준(1915-2000)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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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광복군으로 활약한 신순호는 부모인 신건식-오건해 부부가 안장돼 있는 묘 바로 위편에 남편 박영준(1915-2000)과 함께 안장돼 있다.

1922년생인 신순호는 태어난 과정부터 극적이었다. 아버지 신건식이 1920년대 초 임시정부의 임무를 안고 국내로 잠입해서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어머니가 임신을 하면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신순호는 5살 때인 1926년에 어머니 오건해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아버지 신건식과 극적으로 상봉하는 데 성공한다.

임시정부의 안살림꾼으로 유명한 정정화의 회고(<장강일기>)에 따르면 고운 용모의 신순호는 임시정부에서 일하던 여러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순호의 아버지 신건식과 박영준의 아버지 박찬익은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양 집안의 교류가 긴밀했던 관계로 일찍이 인연이 맺어졌다고 한다.

신순호가 박영준과 충칭 임정청사 대례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은 1943년이었다. 박영준의 회고에 따르면 "이 당시 중경의 한인 사회는 400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동지 간에 결혼을 한다는 것은 다소 드문 일이기도 했다. 결혼식장인 임시정부 강당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가족들과 중경에 있는 한인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라고 한다.

신순호는 10대의 어린 나이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1939)와 한국광복군(1940)에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광복군에서는 선전활동을 맡았고,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에서 근무하면서는 중국 중앙방송국의 한인 상대 한국어 방송 관련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오희영(1924-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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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오희영-신송식의 묘 ▲ 오희영은 한국광복군에서 함께 활동한 동지이자 남편인 신송식(1914-1973)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오희영의 할아버지는 의병장 출신 오인수이며, 애국지사 정정화-오광선 부부가 부모이다. 생존해있는 여동생 오희옥(1926- )과 함께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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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영은 한국광복군에서 함께 활동한 동지이자 남편인 신송식(1914~1973)과 함께 안장돼 있다.

오희영은 북만주 액목현에서 독립운동가 정정산-오광선 부부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오희영의 할아버지는 의병장 출신 오인수다. 생존해있는 여동생 오희옥(1926~)과 함께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오희영은 불과 열여섯의 나이에 오광심·김효숙 등과 중국 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1939)에 입대하여 활약했고, 1940년부터는 한국광복군에도 참여했다. 오희영이 광복군에서 한 역할은 오광심과 더불어 제3지대가 있던 중국 푸양에서 일본군에 징병된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초모공작 활동이었다.

1944년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한 오희영은 한국독립당에 가입한 뒤 광복이 될 때까지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민족해방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 여성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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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1940.6.17) ▲ 1940년 방순희, 정정산, 오건해, 오광심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한국혁명여성동맹은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선언>을 발표하였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참여하고 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민족해방운동 선상에서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봤는지에 대해서는 1940년 방순희, 정정산, 오건해, 오광심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한국혁명여성동맹의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선언'과 오광심이 <광복> 창간호(1941. 2. 1.)에서 쓴 '한국여성동지들에게 일언을 들림' 등을 통해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

한국혁명여성동맹에 참여한 맹원들은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선언'에서 여성과 여성운동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맞춤법 등을 현대어에 맞게 고침).
"우리가 처한 상황이 특수하기에 한국여성운동은 본질적으로 구미의 여성운동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남성들을 상대로 한 여성해방운동, 부녀참정권운동과 같은 구미의 여성운동과 우리의 여성운동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투쟁대상은 일본제국주의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여성운동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 박멸을 목표로 삼아야 하며, 한국민족해방운동의 일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절대 우리 여성의 역량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전 세 20억 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입니다. 우리 3천만 한국민족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 아닙니까? 남녀의 역량을 합하여 각기 맡은바 직분과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세계, 진선진미의 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혁명여성동맹의 일원이기도 했던 광복군의 오광심이 쓴 '한국여성동지들에게 일언을 들림'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맞춤법 등을 현대어에 맞게 고침).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국내에서 만주에서 혹은 관내에서 각 단체의 활동이 맹렬하였지만 그는 다 남자동지들이 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요, 그 중에 우리 여성동지들은 몇 사람이나 되었습니까? 만일 있다고 하면 극소수일 것입니다. 필자는 이것을 우리 운동으로보아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또한 우리 여성을 대표하여 참괴한 땀이 등에 흘려집니다.

우리가 남녀평등을 아무리 부르짖지만은 또는 여권을 찾아보자는 구호가 운소에 높았지만 원래 이런 혁명적 임무를 지지 못하면서 어찌 권리를 말할 수 있으리오. 평등과 권리를 찾으려면 먼저 자체의 분투와 능력이 있고 국가와 사회의 임무를 남자와 같이 부책하고야 될 것입니다."

여성의 평등과 권리는 실제 노력과 행동으로 쟁취해야 하는데, 그 실제 노력과 행동은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한 혁명적 임무(민족해방운동)를 남자와 같이 책임지고 벌이는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광복군에 대한 여성의 참여를 촉구하는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여성의 위대함을 망각하지 말자고 강조하면서 봉건시대의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여성도 광복군에 적극 참여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광복군은 범 삼천만의 광복군이며 삼천만 가운데 일천오백만의 여성도 포함되어 있는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럼으로 이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요,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오며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혁명을 위하여 또는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이 위대한 광복군사업에 용감히 참가합시다. 그리고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 나아가서 우리 여성의 피가 압록·두만강 연안에 흘리며 이 선혈 위에 민족의 자유화가 피고 여성의 평등 열매를 맺게 합시다.

... 우리 여성의 임무는 중요합니다. 남성의 능력으로써 믿지 못할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간첩·교통·구호 등은 능히 우리 여성으로야 능률을 낼 수 있습니다.

여성동지들! 우리 여성의 임무가 어찌 집안에서 아이나 양육하고 밥이나 해주고 길쌈이나 하는 것뿐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어떻게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을 망각합니까?"

반면, 아쉬운 대목도 보인다.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 완롱물, 기생충 등등의 치욕되는 명사는 어느 남자가 준 것이 아니라 우리 여성들이 자취한 것이라 합니다. 동성동지들! 말로 평등과 권리를 부르짖지 말고 실제 노력과 행동을 함으로써 그를 쟁취합시다. 남자와 같이 피 흘리고 남자와 같이 국가와 사회에 부책하고 남자와 같은 능력과 인격이 있다면 누가 능히 우리 손에서 평등과 권리를 빼앗겠습니까?"

오광심의 글이 여성들에게 남성과 같이 혁명적 임무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데 기본 목적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명백한 남성의 잘못마저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는가 하면 여성의 평등과 권리는 '여성이 하기 나름'이라고 이해될 수 있는 대목도 보인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견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려고 하기보다는 이를 비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대목 역시 아쉽다.

아무튼 한국혁명여성동맹의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선언'과 오광심의 '한국여성동지들에게 일언을 들림'은 당시 민족주의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여성운동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소중한 자료다.

임시정부요인묘역에는 왜 여성 독립운동가가 안장돼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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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요인묘역에 설치된 조형물 ▲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열여덟 분의 임시정부요인이 안장되어 있는데, 그 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한 분도 안장되어 있지 않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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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뿐 아니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도 안장돼 있다.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1859~1939), 광복군에서 활약한 김효숙(1915~2003)·김정숙(1916~2012) 자매와 조순옥(1923~1973), 한국광복군 사령관 지청천의 딸로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한 지복영(1920~2007), 1930년대 사회주의계 노동운동에 헌신한 여성독립운동가 이효정(1913~2010), 이병희(1918~2012)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묘역을 둘러보면서 또 하나의 특이점이 확인된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여성 독립운동가가 한 분도 안장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인물이 주로 남성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여성 최초의 임시의정원 의원이었던 김마리아,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았던 정정화와 오건해,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방순희와 정정산 등이 곧바로 떠오르니 말이다.

18위만이 모셔져 있는 임시정부요인묘역의 안장 공간이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임시정부요인묘역에 모셔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를 마땅히 발굴해 안장하는 일에 너무 긴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바랄 뿐이다.

김학규 기자(okhak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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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씀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겸 공동대표입니다. 다음은 서울현충원 여성길④(국가유공자묘역과 전직 대통령묘역의 여성들)을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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