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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이슈 미술의 세계

‘조선의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 안산 성포리 갯마을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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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가 이충렬씨 김홍도 전기에서 밝혀

“‘단원’은 안산 성포리 산중 박달나무 숲”


한겨레

단원 김홍도(1745~1806?)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있을까. 한국 전통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에 대해 한국인들은 아직도 모르는 것들이 많다. 진경산수화와 풍속도, 인물화, 궁중기록화 등 모든 그림 장르에서 능숙했던 단원은 후대에 가장 조선적인 천재화가로 일컬어진다. 겸재 정선과 더불어 조선후기 회화사를 대표하는 양대 거장으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태어난 고향과 주요 명작들을 그리게 된 내력, 숨질 때의 정황과 정확한 몰년, 그리고 `단원‘이라는 저 유명한 호의 연원까지도 안개에 싸여있어 삶의 여러 부분들이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단원의 생애에 얽힌 여러 의문에 대해 기존 학계의 논의에는 없거나 드물었던 새 사료들과 새 해석을 담은 저술이 나왔다. 대수장가 간송 전형필과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전기를 써서 유명해진 저술가 겸 컬렉터 이충렬씨의 신간 <천년의 화가 김홍도>(메디치)다. 단원의 60년 삶에 걸친 연대기를 대중적 필체로 추적, 정리한 이 전기물에서 저자 이씨는 몇가지 눈길 끄는 ‘단원의 새로운 발견’을 들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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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눈길을 끄는 발견은 단원이 태어난 곳을 경기도 안산 성포리 갯가 마을이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한 부분이다. 단원의 고향은 안산설, 서울설이 엇갈리다가, 최근들어 안산 출생이 정설로 자리잡았으나, 구체적인 탄생 장소는 알지 못했던 상황이다. 저자는 김홍도가 연령대에 따라 순차적으로 쓴 `서호(西湖), 단원(檀園)’, 단구(丹丘 또는 丹邱)란 아호가 모두 안산의 성포리 부근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고증하면서 안산 노적봉 아래 성포리 일대 갯가를 출생지로 비정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고 기술한다. 조선시대에는 자신의 출생지를 아호로 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홍도가 맨 처음 사용한 아호는 도화서에 들어간지 사년쯤 되던 해 정한 `서호(西湖)‘였는데, 안산 성포리 앞바다의 별칭이었다. 이런 사실은 역시 이 지역 출신이던 실학자 성호 이익이 성포 서쪽 앞바다를 서호로 칭해 부른 시가인 `석민부(고민을 푸는 노래)’의 구절을 통해 확인된다고 책에서는 밝혀놓았다.

김홍도의 유명한 호인 `단원(檀園)’을 성포리에 있는 명산인 노적봉 기슭에 있는 박달나무 숲이었다고 사실상 단정한 것도 처음 내놓는 논쟁적인 해석이다. 학계에서는 `단원‘이란 호의 유래에 대해 단원이 공부한 중국 화보(습작교과서) <개자원화전>을 간행한 명나라 화가 이장형의 호를 끌어다 쓴 것이란 견해를 정설로 간주해왔다. 단원의 스승이던 표암 강세황이 1787년 그에게 내려준 <단원기(단원 아호에 대한 글)>에서 “내가 생각하건데, 단원은 명나라 이장형의 호이다”라고 적으면서 (단원이) 이장형의 그림 경지를 사모해 이장형의 호를 자기 호로 삼았다고 추정하는 대목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표암 자신의 추측을 말한 것이지, 김홍도가 `단원’이라는 호를 지은 이유를 직접 말했다는 뜻은 아니라고 보았다. 즉, 김홍도가 `단원‘이란 아호를 지은 배경은 성포리 뒷산 노적봉기슭에 스승 강세황이 여주 이씨 문중 사람들과 시회를 했던 박달나무 숲 `단원’ 이 있었던데서 기인했다는 이야기다. 그 `단원‘에서 스승이 젊은 시절 벌인 풍류아회의 경지를 그리워해 단원이란 호를 즐겨 쓰게됐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그 근거로 1753년 가을 표암 강세황이 안산 노적봉 근처에 살던 여주 이씨 가문의 문인들(주로 성호 이익의 조카들이다)과 단원에 모여 읊었던 시를 모은 시집 <단원아집>의 실물 표지와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단원아집>표지에 찍힌 낙관글자인 `성고(聲皐)’가 바로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성고‘는 여주이씨 문중 사람 이재덕의 아호로, 이 시집에 실린 다른 문인 이창환의 시 안에 `성고’에서 고상한 모임(시회)가 열렸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19세기초 나온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1872년 안산 지방지도를 확인한 결과 두 지도에서 성포리를 ‘성고’와 ‘성곶표’로 표기한 대목이 발견된다. 또다른 지역 문인 이경환의 시에는 상고 부근에 늘어선 박달나무 숲이 단원이라는 구체적인 묘사도 등장한다. 저자는 성고 부근에 집이있던 지방 문인 이헌환의 <의추재기>를 뒤져, 집 오른편에 단구가 있다는 기록도 찾아냈다. 즉 단원은 성포리 박달나무 숲이고 단구는 단원 부근의 언덕이며, 이 장소들에 대한 남다른 감회를 지니고 있던 김홍도가 자기의 호로 오랫동안 즐겨 사용했다는 게 결론이다.

아울러 저자는 김홍도의 주요 작품중 하나인 1780년작 <단원도>에 나오는 단원의 한양 집 위치가 학계의 통설인 서울 마포구 성산동 금성산 한강변이 아니라, 인왕산 옆 백운동천 계곡이었다는 점을 밝혔다. 1776년 울산의 목장에서 말을 다루는 관리인 감목관으로 파견된 사실과 당대 현지의 행적도 처음 찾아내 공개했다. 그때 관리로서 목장과 인근 바다의 동정을 살피고 가축에 피해를 미친 산속의 호랑이를 사냥하는 과정을 지켜본 경험이 김홍도 풍속도에 나오는 말 편자 박는 모습이나 물 자맥질 그림, 호랑이그림의 모티브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추정한다. 1805년 12월 죽음을 앞둔 단원이 “월사금을 못보내 탄식한다. 정신이 어지러워 더 이상 쓰지않는다”고 아들 김양기에게 힘겨운 필체로 쓴 마지막 편지의 온전한 이미지도 책에서 처음 독자들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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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당대 양반 및 중인의 문집, 시대상을 그린 당대 소설, 단원의 화풍과 조선 후기 사회를 설명하는 최신 연구 자료를 대조하면서 단원의 삶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던 부분에 대해 새로운 `팩트‘와 분석을 추가했다. 미술사가인 이원복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은 “작고한 미술사학자 오주석(1956~2005)이 단원의 일대기를 연구하면서 기본적인 뼈대를 세웠다면, 이충렬씨의 전기는 여기에 좀더 구체적인 살을 붙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며 “사료 발굴과 사실 관계 고증이란 측면에서 학계 연구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사진 메디치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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