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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내 최고 스펙은 전업주부, 경력 단절이 오히려 경력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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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미리 기자의 1미리] 스타 인테리어 디자이너 조희선

"사무실이 반지하야? 유명한 사람이라고 안 그랬어?" 며칠 전 상담받으러 온 부부가 실망한 투로 내뱉었다. "처음엔 기분 나빴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칭찬 같았어요. 15년 전 합정동 지하에 사무실 있을 땐 아무도 이런 말 안 했거든요. 실망했다는 건 기대가 있었다는 의미잖아요. 조희선 성공했다는 얘기인가 싶었죠(웃음)."

차 한 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서울 망원동 골목길, 3층짜리 연립주택을 개조한 건물 맨 아래. 길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반지하 사무실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 조희선(51·바이조희선 대표)씨가 하얀 이 드러내며 웃었다. 한 달 전 이사 들어왔다는 새 사무실엔 앞집에서 따다 준 감이 놓여 있었다.

김명민·황신혜·소이현·김태균·유준상 등 연예인들 집 인테리어 많이 하기로 유명한 디자이너, 스타만큼 유명한 주부들의 스타. 20년 베테랑 조희선에게 붙는 수식이다. 2000년대 국내 리빙 잡지 칼럼을 평정했고, 3년째 SBS '좋은 아침'의 인테리어 코너 '하우스' MC를 맡고 있다. 실무 경력을 인정받아 디자인 비전공자인데도 2014년에는 교수(신한대 공간디자인학과 특임교수)로 임용됐다. 최근엔 삼성전자 갤럭시 S10 모델로도 등장했다.

커리어 우먼 이미지 뿜어내지만 한때 그녀는 육아와 씨름하는 전업주부였다. 꼬박 10년 달고 살았던 '경력 단절 여성(경단녀)' 꼬리표를 어떻게 인테리어 전문가로 갈아치웠을까. 그녀의 반전 인생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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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 배우, 국내 1호 여성 외제 차 딜러…. 화려했던 날을 접고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가 됐던 조희선씨는 집 인테리어를 수시로 바꾸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 경험이 쌓여 실력이 됐다. 그녀는 “주부 경력이 결국 최고 스펙이 됐다”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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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들 사람이 없었다, 일해야겠다 결심했다

첫 직업은 배우. 예쁘장한 외모 덕에 다섯 살 때부터 중3 때까지 아역 배우로 활동했다.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 '여인열전-장희빈' 등에 출연했다.

―사회생활을 이른 나이에 시작한 셈이네요.

"엄마 욕심이었죠. 똑순이 김민희가 후배인데 민희 같은 애는 연기력이 좋아 주목받았어요. 저는 끼가 전혀 없었어요. 몇 해 전 호랑이 선생님 멤버들이 모인 자리에서 돌아가신 조경환 선생님이 저더러 '얼굴은 예뻤는데 연기는 참 못했다'고 팩트 폭격 하셨어요. 하하."

―왜 배우를 관뒀나요.

"연기가 도무지 안 늘었어요. 아버지 반대도 심했고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인데 촬영 때문에 자정 넘어 들어가기 일쑤였거든요. 대학 입시 공부도 해야 했고."

대학 졸업 후 직업은 외제차 딜러였다. 1990년 한성자동차에 입사해 벤츠 딜러를 했다. 20대 초반의 국내 첫 여성 외제차 딜러였다. 언론 인터뷰도 꽤 했다.

―자동차 딜러는 어떻게 됐습니까.

"취직했으니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나 보다 했는데 웬걸요. 여직원은 모두 유니폼을 입으라는 거예요. 너무 싫었어요. 유니폼 안 입을 방법은 없나 고민하고 있는데 대사관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딜러 자리가 났어요. 신입 사원인데 손을 번쩍 들었어요."

딜러 중 유일하게 운전면허가 없었다. 그녀만 회사 기사가 운전해 주는 벤츠를 타고 대사관으로 향했다. 계약이 끝나면 신데렐라는 유리 구두를 벗어야 했다. 버스 타고 터벅터벅 '뚜벅이'로 귀가했다.

―계속했으면 성공하지 않았을까요.

"화려했지만 적성엔 안 맞았어요. 관두고 일본으로 디자인 유학을 가자고 결심했어요. 딱 2년 직장 생활을 채우고 퇴직금까지 탈탈 털어 일본 학교로 입학금을 보냈죠." 유학을 앞두고 아는 동생과 스키 타러 갔다가 남편을 만났다. 유학 대신 결혼을 선택했다. 이후 10년 동안 집에서 아들 둘을 길렀다.

―전업주부로 살다가 일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뭔가요.

"20년 전 멀쩡하던 남동생이 뇌출혈로 쓰러졌어요. 아버지가 남동생을 돌보셨어요. 그런데 병간호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뜨셨어요. 석 달 뒤 남동생마저 저세상으로 갔고요. 집안 남자 둘이 같은 해에 몽땅 떠났어요. 1남 2녀 중 장녀인데 여동생은 국제결혼 해서 일본에서 살았어요. 제가 줄초상을 치러야 했죠."

슬퍼할 틈도 없었다. 당장 관(棺)을 들 사람이 없었다. 친척은 적고, 직장 관둔 지 한참 됐을 때라 동료도 없었다. 결국 남편 회사 동료가 운구했다. 장례식장은 파리 날렸다. "저 자신이 참 한심하고 처량했어요. 직장에 다녔으면 아버지·동생 외롭게 안 보냈을 텐데, 후회가 밀려왔어요. 눈물 머금고 결심했어요. 일을 해야겠다고, 내 이름을 찾아야겠다고." 상주(喪主)가 된 30대 초반 '경단녀'는 인생의 방향키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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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갤럭시S10 광고 모델로 등장한 모습. /삼성전자


―맘처럼 도전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 무렵 남편(벤처캐피털리스트)이 차를 바꾸면서 운전면허를 따보라고 했어요. 폐차 직전 고물차를 줄 테니 기름값 벌 자신 있으면 나가서 일해보라면서. 나 원 참, 오기가 생겨 진짜 기름값 벌어보자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화제던데 ‘68년생 조희선’이 그렇게 살았어요(웃음).”

―왜 처음 해보는 인테리어 일로 틀었나요.

“원래 집 꾸미는 걸 좋아했어요. 첫아이 돌 때 24평 아파트를 처음 장만했어요. 문고리 하나까지 직접 골라 집을 꾸몄죠. 한번은 아기 띠 매고 방산시장에 가서 방문 손잡이 다섯 개를 샀는데 생각보다 무거웠어요. 낑낑대며 들고 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어요. 반사적으로 아이와 손잡이 둘 다 살리려다가 무릎을 찧었어요.” 아이 돌잔치 치르고 연골 수술을 받았다. “집을 수시로 바꾸면서 갑갑함을 해소했던 것 같아요. 밖에서 일을 못하니 ‘내 집 디자이너는 나’라는 생각으로 억척스레 매달린 거죠. 집이 실험실이자 직장이었어요.”

―취미로 꾸미는 것하고 일은 다른 차원인데요.

“큰아이 이름(세호)을 넣어 Seho’s home(세호의 집)이라는 싸이월드 계정을 만들었어요. 미니 홈피에 집 꾸민 사진을 계속 올렸어요. 알음알음 팬이 생겼어요. 그러다 리빙 잡지사 기자가 ‘형제 방 독특하게 꾸민 집을 구한다’고 인터넷 카페에 올린 공지를 봤어요. 연락했는데 운 좋게 잡지에 실렸어요.”

웬만한 전문가보다 실용 정보를 많이 아는 그녀를 눈여겨본 잡지사에서 인테리어 코디네이터 일을 제안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 동안 을지로 가구 거리를 돌아다니며 현장을 공부했다. 매일 시장 조사차 갔던 타일 가게 사장님이 후에 고백했다. “이상한 여자인 줄 알았어. 만날 와서 타일은 안 사고 가격만 묻고 가는 거야(웃음).”

―시작은 어땠나요.

“2000년에 ‘꾸밈바이조희선’이란 이름으로 사업체 등록을 했어요. 명함엔 이름, 전화번호, 싸이월드 주소가 끝. 사무실이 집이라 차마 주소는 못 넣겠더라고요.” 첫 프로젝트는 친구 동생 신혼집이었다. “예산이 없어서” 찾아온 거였다. 조금씩 의뢰가 늘어났다. 5년 뒤 합정동 지하에 첫 사무실을 열었고, 몇 년 뒤 그 건물 3층으로 이전·확장했다.

―그때와 지금, 격세지감 느끼겠어요.

“얼마 전 삼성전자에 모 배우의 집 인테리어 프로젝트를 제안했어요. 그런데 삼성전자에서 그 배우는 됐고, 제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자고 역제안을 해왔어요. 이제 내 이름이 브랜드가 됐구나 싶었어요.” 명사들의 몸값 가늠자로 통하는 강연료가 인기를 보여준다. 20년 전 첫 강연 때 20만원을 받았는데 최근 기업 강연에서 860만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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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이사 온 망원동의 새 사무실 밖에 앉은 조희선씨. 뒤로 보이는 곳이 반지하 사무실이다. 난간 옆에 설치한 벤치와 작은 테이블은 지나가는 동네 주민들을 위한 그녀의 작은 배려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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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단녀? 주부도 경력이다

몇 달 전 TV 프로그램에서 ‘경단녀’를 주제로 옛이야기를 들려줬다. 함께 나온 패널은 요가복 브랜드 ‘안다르’ 신애련(28) 대표. 큰아들보다 두 살 많았다. “자식뻘 패널이 나오는데 제 얘기가 무슨 공감을 살까 싶어 망설이다가 출연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반응이 어땠기에요.

“방송 직후 인스타그램으로 ‘희망을 줘서 정말 고맙다’는 30대 아이 엄마들 메시지가 쏟아졌어요. 제가 경단녀였던 게 20년도 넘은 일이에요. 왜 그때보다 나아진 게 없을까, 맘이 아팠어요.”

―그들에게 조언한다면요.

“주부는 경력 단절이 아닙니다. 주부 그 자체가 경력이에요. 제가 전업주부로 산 10년은 지금 일 하는 데 ‘핵심 경력’이 됐어요. 애 둘(큰아들은 대학 졸업반, 작은아들은 군인)을 키웠죠. 20평대 아파트, 심지어 그 평수에서 시어머니도 모시고 살았어요. 이런 경험이 있으니 고객에게 삶에서 우러난 해답을 줄 수 있어요.”

전업주부가 돼 ‘경력 단절’되는 게 아니라 주부로 ‘경력 전환’ 한다고 발상을 바꾸면 가능성이 보인다고 했다. 탄탄대로가 뚝 끊긴 것 같은 ‘경단녀’가 아니라 잠시 우회도로를 탄 느낌의 ‘경전녀(경력 전환 여성)’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왕이면 원래 하던 일 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권해요. 하던 일로 돌아가면 공백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져요. 그사이 뒤처졌다는 생각도 들고요. 새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밑바닥부터 배우겠다는 자세를 갖게 돼요. 실패가 덜 두렵습니다.”

―빨리 시작할걸 하는 후회는 없나요.

“결혼하면서 디자인 유학 포기한 걸 후회했더니 지인이 그러더군요. 남들하고 비슷한 경로로 갔다면 고만고만한 인테리어 하는 조희선이지, 포털에 이름 나오는 유명인은 되지 못했을 거라고. 동의해요. 비전공자라는 핸디캡을 극복하려고 더 악착같이 했어요.”

―예를 들자면 어떤 거죠?

“일 시작할 때부터 콘텐츠를 차곡차곡 모으면서 공부했어요. 인테리어 일이 프로젝트 끝나고 문 닫고 나오는 순간 그 집은 내 집이 아니에요. 잡지 촬영을 하면 사진 저작권은 잡지사에 있어요. 초창기부터 개인 포토그래퍼를 고용해 일일이 작업을 기록했어요. 이 자료가 저만의 아카이브가 됐어요. 덕분에 책도 빨리 낼 수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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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선씨가 20년 산 상암동 43평대 아파트. 한집에 오래 머물며 집을 바꿔가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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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이냐, 하우스냐

―지금까지 고친 집이 몇 집 되나요.

“200~300집 정도 될 거예요.”

―가장 기억나는 집은요?

“배우 김명민씨 집요. 10년 전쯤 ‘베토벤 바이러스’ 직후 최고 정점에 있을 때 명민씨가 저를 찾아왔어요. 톱 중의 톱이던 시절이라 바짝 긴장했는데 그러더군요. 연기는 자기가 전문인데 인테리어는 실장님이 전문 아니냐, 마음대로 하시라, 전적으로 존중하겠다고. 프로였어요. 요구 사항이 하나 있었는데 대본 보는 방에 빛이 안 들어오게 해달라고 했어요. 있는 창을 막았어요. 그 방에 컴퓨터 세 대를 두고 캐릭터 연구를 하더군요.” 이후 그와 인연이 계속돼 세 차례 인테리어 작업을 했다.

―유명인 집만 할 것 같은데 누구나 보는 홈쇼핑 프로그램에도 나왔어요.

“디자이너라면 모두 상위 0.1%를 대상으로 한 인테리어를 꿈꿔요. 그 일은 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톱 배우건 아니건 집 인테리어할 때 하는 얘기가 똑같아요. 예산이 부족하다, 벽지는 어떤 색깔이 좋을까…. 이런 소소한 물음에 답해주는 ‘쇼핑 메이트’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홈쇼핑에 출연했어요. 덕분에 ‘친절하게 인테리어 설명해 주는 언니’ 이미지가 생긴 것 같아요.” 20년 노하우를 담아 최근 펴낸 책 ‘더 퍼스트 인테리어 쇼핑’(몽스북 刊)에도 0.1%를 위한 그림의 떡이 아니라 ‘가심비’ ‘가성비’를 고려한 실용 정보를 담았다.

―20년 동안 고수한 철칙이 있다면요?

“집은 모시고 사는 곳이 아니라는 것. 의뢰한 집에 내 스타일이 들어가지만 살면서 집주인의 라이프스타일이 담길 여지는 꼭 둡니다. 또 집을 예쁘게 꾸미는 것보다 내실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해요. 배관, 배수 등 설비부터 튼튼히 해야 합니다. 예쁘게 겉만 덮으면 소용없어요. 예쁜 껍데기 안쪽으로 하자가 있을지 몰라요. 일이 커집니다.”

―집에 대한 관심은 커졌는데 돈 부족한 사람이 많습니다.

“예산이 없으면 책 보고 발품 팔아 공부하기를 권합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인증 사진들 말고요. 사진을 위한 사진일 뿐 내 집에 절대 똑같이 구현되지 않아요. 우리도 프로젝트 할 때 그런 참고용 사진을 쓰지만 현실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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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노하우를 담아 최근 펴낸 책 ‘더 퍼스트 인테리어 쇼핑’(몽스북 刊).


―인테리어 노하우를 하나 알려준다면.

“집을 고치는 건 일생에 몇 번 못 해요. 물건을 잘 골라 전체 스타일링을 잘하는 게 더 유용해요. 저는 이걸 ‘소프트 스타일링’이라고 해요. 가격이 합리적인 제품을 사서 내 식으로 꾸며 섞는 거예요.”

―자택은 어떻게 꾸며놨나요.

“상암동 43평짜리 아파트에서 20년째 살고 있어요. 네 번 개조했어요. 마지막 리모델링한 게 5년 전이었는데 앞으로는 안 바꿀 생각이에요.”

―의외네요. 집을 자주 바꿀 거라 생각했는데.

“집을 하우스(house·물리적인 집)로 보느냐 홈(home·생활 공간인 집)으로 보느냐의 문제예요. 재산 증식 수단으로 사는(買) 집이 아니라 사는(住) 집을 생각한다면 한집에 오래 살면서 내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내부를 바꿔 주는 게 좋다고 봐요.”

집도, 일도, 20년 묵었다. 쉰이 훌쩍 넘은 ‘에너자이저’는 다시 일을 벌였다. “사무실에 젊은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공간을 곧 열어요. 망원동 골목에 활력을 주고 싶어요.” 그제야 사무실 밖 난간 옆에 설치한 벤치, 테이크아웃 잔 올려 놓을 수 있는 앙증맞은 테이블이 보였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이 쉬어 가게 배려한 디자인이라고 했다. 20년 전 일이 고파 제 집을 뜯어고쳤던 그녀의 이번 실험실은 동네다.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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