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화성 8차 사건으로 복역 윤모씨 "강압 수사 경찰 공개 사과해야"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취재진 만나 "쪼그려 뛰기 시키고 발로 걷어차…영문도 모른 채 체포돼" 증언

(청주=연합뉴스) 이승민 기자 =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돼 20년을 복역한 윤모(52)씨는 21일 "사건 당시 강압 수사를 한 형사들이 지금이라도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1일 오후 청주에서 윤모씨가 취재진을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이승민 기자 촬영]



윤씨는 이날 청주에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화성 8차 사건으로 체포됐을 당시 명백히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강압 수사는 없었다는 당시 형사들의 주장을 담은 언론 보도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공정하게 판단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윤씨는 "이춘재의 자백으로 누명을 벗을 희망이 생겼다"며 "20년이라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지금이라도 경찰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고 명예를 회복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박모(당시 13세) 양의 집에서 박 양이 성폭행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에 대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으로 체모에 포함된 중금속 성분을 분석했고, 경찰은 국과수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윤 씨를 범인으로 검거했다.

윤 씨는 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을 확정받아 복역하던 중 감형받아 수감 20년 만인 2009년 가석방됐다.

이춘재가 8차 사건이 자신의 범행이라고 시인하면서 윤씨는 현재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은 윤씨와의 일문일답.

연합뉴스

21일 오후 청주에서 윤모씨가 취재진을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이승민 기자 촬영]



-- 어떻게 화성에서 살게 됐는가.

▲ 태어난 곳은 안성이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4남매가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혼자 화성으로 가서 살았다.

-- 화성 8차 사건 당일 상황을 설명해 달라.

▲ 1988년 9월 16일 평소 알고 지내던 홍모씨와 함께 있었다. 홍씨와 함께 잠을 잤고, 그는 항소심에서도 같은 취지로 증언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재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사건 이후 경찰이 언제 찾아왔었나.

▲ 정확하지는 않지만, 1989년 5월부터 찾아온 것 같다. 체모를 뽑아달라고 해서 뽑아줬다. 두 달에 걸쳐 총 6차례 체모를 뽑아줬다. 형사들은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재차 체모를 뽑아갔다. 당시 농기계 수리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업체 사장과 직원의 체모도 뽑아갔다. 직장과 집 근처에서 형사들이 감시하기 시작했었다.

-- 체포 과정은 어땠나.

▲ 7월쯤이었던 것 같다. 직장 동료들과 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형사가 집에 찾아오더니, "잠깐 가자"라고 해서 파출소로 갔다. 이후 승합차를 타고 야산 속에 있었던 별장으로 갔다. 최모 형사를 비롯한 경찰들이 뭐라고 얘기했는데 잘 이해하지 못했다. 조사를 받은 뒤 수갑을 채웠다.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20분 정도 받았다. 영문도 잘 모르고 체포당했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 조사 과정은 어땠나.

▲ 경찰서에서 조사받으면서 쪼그려 뛰기를 하라고 했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기 때문에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번 하고 넘어졌다. 왜 쪼그려 뛰기를 시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형사들이 발로 걷어찼다. 현장에는 최 형사와 장 형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3일간 조사를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 어떻게 자백을 했나.

▲ 잠을 못 자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경찰은 5시간 만에 조사를 끝냈다고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3일 정도 받았다. 잠을 못 잤고, 밥을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조사를 받았는지 경황도 없었고, 지장을 찍으라고 해서 찍었다. 그것이 (자백으로) 인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졸업을 못 했는데, 당시에는 글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였다.

-- 경찰 조사에서 강압이 있었나.

▲ 당시 최 형사가 사건 현장에서 음모가 나왔다고 했다. 내가 범인일 확률이 99.9%라고 했다. 나는 가본 기억도 없는데 왜 나왔을까 싶다. 체모를 경찰이 6번 뽑아갔는데, 이건 조작됐다고 봐야 한다. 사건 현장에서 음모가 나왔다면 왜 1년 가까이 지난 뒤에 나를 검거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사건 현장에서 발자국이 나왔다는 얘기가 있는데.

▲ 어떤 발자국이 나왔는지 본 적이 없다. 다리가 불편해서 왼쪽 신발은 앞부분만 땅에 닿는다. 증거가 된 족적 사진도 본 적이 없고, 그것이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현장 검증은 어떻게 했나.

▲ 검찰로 넘어가서 현장 검증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1.6m 높이 담인데, 그 담을 혼자 힘으로 넘을 수가 없다. 넘은 적도 없는데 당시 보도는 담을 넘었다고 나왔다. 멀쩡한 성인 남성도 겨우 넘는 담을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혼자 넘을 수 없다.

연합뉴스

윤씨의 불편한 다리.
[이승민 기자 촬영]



-- 피해자 오빠와 지인이라는 얘기가 있다.

▲ 피해자 오빠를 본 일이 없다. 그 집 구조도 모른다. 사건 전에 그 집 근처에 간 적도 없다. 어쩌다가 출장 갈 때 지나갔을 수는 있지만, 그 집에 대해서는 모른다.

-- 최근 국정감사에서 이슈가 된 이근안에 대해서 알고 있나.

▲ 언론 보도를 통해서 알았다. 당시 화성에서 조사를 받을 당시에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나.

▲ 1·2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변호사와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국선 변호인이 선임됐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판결문을 보고 알았다.

-- 항소심에서야 억울함을 호소한 이유는 무엇인가.

▲ 1심에서는 사형을 당할 거라고 주변 사람들이 얘기했다. 시인하고 동정을 구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1심에서는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했다. 항소심에서는 검사에게 재수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 수감 생활은 어땠나.

▲ 원주교도소에서 3개월가량 머문 뒤에 청주교도소로 넘어와 18년 넘게 살았다. 종교의 힘으로 버텼다. 교도관, 교화위원들의 덕을 크게 봤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 없었을 것이다.

-- 교도소에서는 재심에 대한 생각은 없었나.

▲ 교도관들에게 물어봤는데, 남아 있는 서류나 정황상 사건을 뒤집을 만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이춘재에 대한 보도가 나왔을 때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는 그냥 조용히 살려고 했다.

-- 청주에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고향과 가족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우리 사회에 편견이 있지 않나. 출소자가 사회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출소한 뒤 6개월 동안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로 살았다. 지금은 일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 당시 수사 경찰들이 강압 수사가 없었다고 하는데.

▲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체모가 100% 증거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나 말고도 화성 사건 피해자가 많다. 고문을 당했다는 증언이 많다. 판단은 국민에게 맡기겠다.

-- 당시 형사들의 사과가 있었나.

▲ 없었다. 따로 연락이 온 적도 없다. 지금이라도 나와서 진정성 있게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나는 명예를 찾고 싶다. 인간 된 도리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다.

logos@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