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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특파원 칼럼] 강제동원은 무엇이었을까 / 조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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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기원
도쿄 특파원


“식민지 조선에서 징용이 실시된 기간은 극히 짧았다.”

최근 한국과 일본 일부에서 강제동원은 역사 왜곡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최근 화제가 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에도 이런 내용이 일부 실려 있다. 이들이 주요한 근거로 드는 내용은 일본이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에서 법적인 의미의 ‘징용’을 실시한 시기가 달랐다는 점이다. 일본 본토에서는 징용의 근거가 된 ‘국가총동원법’을 근거로 한 국민징용령이 1939년 7월부터 실시됐으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1944년 9월부터 실시됐다는 점을 든다. 조선에서는 일본 본토와 달리 1939년부터 1944년 9월까지 ‘모집’과 ‘관 알선’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서 노동자를 동원했으며 모집과 관 알선은 법적인 의미의 강제성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들으면 마치 조선인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형식적 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집이라고 이름 붙인 경우에도 일본 기업이 식민지 조선의 관리들을 회유해 조선인을 협박하거나 납치해서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모집만으로는 인원을 채울 수 없게 되자, 1942년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직접 개입해 조선인을 동원하는 이른바 관 알선이 병행됐다.

모집과 관 알선의 실태를 증언하는 자료는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 중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 벙커 건설 공사에 동원됐던 경남 창녕 출신 김창기씨가 1992년 증언한 내용이 <바위 그늘의 이야기―마쓰시로대본영공사의 노무동원>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2월께인가. 면 직원이 와서 아무런 말도 없이 집에서 끌려갔다. 25살 때였다.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었다… 화물열차를 탔는데 사람들을 가득 태운 채로 밖에서 잠겨 있었다”고 증언했다. 2년 정도 일을 하고 해방이 되어 돌아왔다는 증언을 남겼는데, 이를 토대로 추정하면 1943년 말에 동원된 것으로 보이며 동원 방식은 모집과 관 알선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형식적으로 어떤 방식을 적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씨에게 현실은 그저 ‘끌려간 것’이었다.

일본 시민단체인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자료에는 전남 고흥군에서 나가노현 온타케 발전소 공사장에 동원됐던 양병두씨의 증언이 실려 있다. “1943년 7월 중순이었다. 일본인 순사가 와서 나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오라고 했다. 따라갔더니 유치장에 처넣었다. 트럭으로 여수항에 끌려가서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법적인 의미의 징용은 아니었으나 실상은 강제동원이었던 셈이다.

일본에 가면 벌이가 괜찮다는 말에 속아서 간 조선인도 있었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모순이 낳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에 간 조선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작업장에 배치된 뒤에는 기업이 공권력과 합작으로 도주를 막기 위해 감시하고, 임금은 저축을 명목으로 일부만 지급하는 등 강제노동에 시달린 경우가 태반이었다.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는 사이좋게 지냈다” “차별은 없었다”는 주장이 일본에서도 가끔 나온다. 물론 개별적으로 조선인 노동자 일부와 일본인이 사이좋게 지낸 경우가 있었다. 배를 곯는 조선인 노동자에게 일본 농민이 귤을 건네줬다는 증언도 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이 조선인 노동자에게 일정한 경우 외출을 허용하는 때도 있었다. 전쟁 중이라도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 동원된 사람이라도 항상 울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당시에도 삶은 복잡하고 다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강제노동이라는 본질을 지울 수는 없지 않은가.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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