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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열린 가능성의 공간 옥상, 시민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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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콘서트·전시회·영화제 등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한 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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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하늘 봐봐.”

관객석에 앉은 한 아이가 외쳤다. 머리 위 가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이 빚은 어둠이 점점 깊고 진해지고 있었다. 관객석 멀리 아래쪽으로 아파트 불빛과 상가의 네온사인이 보였다.

9월27일 저녁 7시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구리아트홀을 찾았다. 옥상 정원에서 ‘어쿠스틱 루프탑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다. 한복을 입은 해금 연주자 한지수씨가 무대에 올랐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구슬픈 해금 소리가 퍼졌다. 어떤 이는 야간봉을 흔들고 또 어떤 이는 옆사람의 어깨에 기대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했다. 마치 세상과 떨어진 ‘공중의 섬’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에 초대받은 것 같았다.

두 아이와 함께 공연을 보러 온 채선미(42)씨는 “아이들과 가까이에서 연주회를 보고 싶어서 왔다”며 “바람을 맞으며 야외에서 연주를 들으니 더욱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구리아트홀에서는 지난해부터 9월 말과 10월 초에 ‘어쿠스틱 루프탑 콘서트’를 열고 있다. 구리아트홀의 김남선 공연기획팀장은 “하늘이 높고 예쁜 가을은 야외 공연을 하기 좋은 계절이에요. 이 계절을 느끼며 조용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로 아트홀 옥상이 제격이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실내 공연장보다 작은 옥상 공간은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1m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관객이 100여 명 들어갈 수 있다. 야외에 있는 작은 소극장 같은 곳이다. 김 팀장은 “야외 무대이다보니 관객의 공연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다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음악회를 즐겨요. 가족 관객이 많이 오시는데 ‘공연장에 나들이 온 것 같다’고 하세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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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와 하늘·바람이 만나는 곳



이처럼 루프탑 콘서트가 열리는 옥상이 있는가 하면 다른 지역의 옥상에서는 옥상전시회, 옥상영화제, 옥상캠핑 등이 열리고 있다. 그동안 잠겨 있거나 방치된 공간이었던 옥상이 이제는 시민들을 위한 문화·예술의 장이자 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콘크리트 건축물로 뒤덮인 도시에서 하늘과 바람 등 자연을 만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장소로도 변모하는 것이다. 이 옥상을 책 <옥상의 공간사회학>에서는 “우리 시대의 마당”이라고 부른다. “옥상이 마당의 역할을 대행하는 생활공간의 일부가 되면서, 과거 집 안 마당이나 동네 골목길이 수행하던 사회·문화적 기능이 콘크리트 도시 공간 속에서 부활”하고 있다는 얘기다. 책 <옥상의 정치>에서도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되고 주택 면적이 좁아지면서, 마당이 담당했던 일정한 역할을 ‘옥상’이 대체했다”고 썼다.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있는 서울혁신파크의 옥상은 이곳 주민들의 너른 마당 같은 곳이다. 시민들이 행사를 할 수 있도록 옥상을 빌려주거나 옥상 8곳을 놀이터, 텃밭, 공연장 등으로 꾸몄다. 이곳 옥상을 10개 시민단체가 모여 꾸린 협동조합 ‘열린옥상’에서 관리하고 있다. 10월1일 서울혁신파크에서 만난 열린옥상의 박혜원 대표는 옥상을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이 모임을 만들었다고 했다.

‘옥상 예찬론자’인 박 대표는 책 읽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소셜벤처 ‘히든북’을 운영하며 여러 옥상에 올라갔다. 2016년부터 옥상에서 책 읽기 행사를 진행했다. “녹지가 부족한 도시에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옥상이에요. 답답한 실내를 벗어나 바람도 쐬고 하늘도 볼 수 있잖아요. 그런 공간이 주는 해방감과 행복감이 있어요.”

박 대표는 서울혁신파크에 있는 열린옥상의 한 곳에서는 시민들이 배추를 심어 가꾸고 있다고 했다. “옥상에 텃밭을 만드니 시민들이 그곳에 씨를 뿌리고 작물을 키워요. 반려동물을 데리고 와 산책하는 분들도 있고요. 이렇게 옥상을 이용하는 시민들 모습을 볼 때 열린옥상을 만드는 보람을 느껴요. 옥상 문을 여니 시민들이 이곳으로 모여요.”

박 대표는 다른 나라에서도 옥상이 버려진 공간에서 가능성의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네덜란드에서는 매년 암스테르담에서 루프탑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암스테르담 건물의 옥상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파티를 즐기는 행사다. 옥상을 녹지화하는 프로젝트, 지붕에 새집을 만들어 새와 공존할 수 있는 버드하우스 프로젝트 등 다양한 옥상 활용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박 대표는 “국내의 옥상을 연결하고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할 것”이라며 “내년에는 전국 옥상 활용 지도 만들기, 옥상 네트워킹 파티 등을 할 계획”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 시대 ‘마당’이 되다



자연과 현대미술을 함께 볼 수 있는 옥상도 있다.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사비나미술관의 옥상이다. 10월1일 미술관 옥상에 올라가니 북한산 전경과 진관동 일대가 한눈에 보였다. 미술관에서는 옥상을 개방하고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곳에는 박기진 작가의 설치미술 <통로>가 있다. 미술관이 지어질 때부터 자리한 작품이다. <통로>는 철문을 따라 산책하듯 걷도록 설치했다. 철문을 통과하며 천천히 걸었다. 바닥에 자갈이 깔린 철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명상의 길’ 같은 곳이다.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이 길을 걷고 사진을 찍고 주위 풍광을 볼 수 있게 했다.

이곳 5층 옥상 아래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또 다른 옥상이 나온다. 이곳에는 러시아 출신 작가 레오니트 티시코프가 만든 인공달 작품 <달로 가는 계단>(The Stairs to the Moon)이 있다. 저녁에 멀리서 미술관을 바라보면 건축물 꼭대기에 달린 빛나는 달을 볼 수 있다. 작가가 현대인들의 고독과 소외감을 달빛으로 비춰주고자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비나미술관의 강재현 학예실장은 “미술관 옥상까지 전시의 장으로 만들었다”며 “옥상의 콘셉트는 자연과 쉼”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옥상정원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미술관은 옥상에서 순수미술, 디자인, 건축 등 다양한 시각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의 실험적인 공간 설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올해 5월부터 ‘2019 루프탑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첫 선정 작가는 디자이너그룹 ‘진달래&박우혁’이다. 진달래&박우혁은 형태와 색, 빛을 이용한 설치작품 <두 개의 조각>을 선보였다. 가로 길이가 4m 넘는 거대한 광고판 같은 형태의 <두 개의 조각>은 빨간색과 파란색을 대비해 보여주며 두 개의 규칙과 질서를 드러낸다. 낮에는 자연과 대비를 이루고, 밤에는 인공 빛을 발광하며 기하학적 형태를 보여준다. 미술관은 옥상에서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도 연다. 강 실장은 “옥상에서 행사할 때는 안전 관리 등 신경을 써야 하지만 옥상은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매력적인 공간”이라고 말했다. 11월에는 옥상에서 음악과 마임 등이 어우러진 퍼포먼스 행사를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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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10월 옥상 문화·예술 행사 봇물



옥상이 극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원주옥상영화제, 군산 공설시장청년몰 옥상영화제 등이 있다. 그중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여는 ‘산복도로 옥상달빛극장’이 대표적이다. 영화제는 2016년부터 매년 8~9월 부산 서구에서 옥상달빛극장을 열고 있다. 부산국제단편영화제의 하지훈 사무차장은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극장이 없는 산동네에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달빛극장을 열었다”고 했다.

옥상달빛극장에서는 부산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영화 감독들의 장·단편 영화, 지역 대학생들이 제작한 단편영화 등 다양한 작품을 무료로 상영한다. 지역에 있는 예술가들의 창작물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영화제이기도 하다. 더불어 옥상에 마련한 극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매력이 크다. 산복도로 옥상달빛극장을 처음 열었을 때는 동네 주민들이 주로 들렀다면 이제는 20~30대 여행객이 자주 찾는다. 부산 산복도로 마을의 명소가 되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상영을 못하는 등 제약이 많죠. 하지만 야외에서 영화를 보는 낭만도 있고 아름다운 산복도로의 야경을 내려다보는 즐거움이 있어요. 이곳에 오신 분들이 영화뿐 아니라 옥상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을 잊을 수 없다고 하세요. 그 덕에 옥상극장이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또 하나의 장소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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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옥상 문 열리길”



쉼터, 극장, 콘서트장, 전시장으로 변모한 옥상의 문이 열리고 있다. 사유에서 공유로, 모두를 위한 옥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경덕 시인은 시 ‘옥상’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다닥다닥 달린 창문을 빠져나와/ 넥타이를 풀고 잠시 숨을 돌리는 곳, 도시의 숨구멍은/ 결국 이 옥상이다”라고. 사막 같은 현대 도시에서 오아시스처럼 존재하는 옥상은 문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확인하고 배양하는 장소로 재탄생하고 있다. 그곳에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 싶은 욕망, 높이 오르려는 욕망이 만난다. 열린옥상의 박혜원 대표는 “더 많은 곳의 옥상 문이 열렸으면 해요. 그만큼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 많아지고 확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초대한다. “열린 옥상으로 따라와!”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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