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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우창 봉기(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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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911년 10월 10일 단 하루 만에 우창 전역을 장악하고 11일 후베이 독립정부 수립을 선포한 우창봉기 주역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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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신해혁명 기념일’이고, 중화민국(대만)의 건국기념일인 ‘쌍십절’이다. 쑨원(孫文)이 난징에서 중화민국 건국을 선포한 것은 1912년 1월 1일이지만, 근대 공화국 수립 자체보다 수천 년 전제 왕정을 허물기 시작한 날을 기점 삼은 것이다. 그 기점의 기점, 즉 신해혁명의 신호탄이 1911년 10월 10일 저녁 8시, 양쯔강 중류 후베이성 우창(武昌)에서 올랐다. 우창봉기였다.

오늘날의 우창은 성도 우한의 한 개 구지만, 당시에는 우창이 성도였다. 충칭(重慶)과 상하이를 잇는 철도와 수운의 결절지이고, 1858년 텐진조약 이래 영국과 독일 프랑스 등 5개국 조계가 운영되던 국제도시였다. 이름처럼 신식 군수물자 중심의 산업 거점 도시이기도 해서, 시민의식이 상대적으로 덜 봉건적이었고 총독 관할 주둔군인 신군(新軍)체제의 엘리트 청년들이 많았다. 아편전쟁 이후 이어진 반봉건-반외세 비밀결사단체들은 현지 총독 관할 하의 주둔군 청년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즉 우창은 근대 민족주의 혁명의 도시이기도 했다.

외세에 철도를 넘겨주지 말자는 운동인 ‘보로(保路)운동’은 반 외세의 상징적ㆍ실질적 운동이었다. 1911년 5월 쓰촨(四川)성에서 시작된 철도조차권 외세 이양 반대 시위가 유혈 봉기로 확산됐다. 서부 내륙 쓰촨성은 금, 은, 구리, 철 등의 자원이 풍부한 광업지역이었다. 현지 계엄군만으로 폭동 진압이 힘들어지자 청 조정은 인근 성에 진압군 차출 파병을 지시했다. 후베이의 군 지휘부와 병사 일부도 파병됐다. 그 공백을 틈타 우창봉기가 시작됐다.

밤 사이 우창 전역을 장악한 혁명군은 11일 새벽 후베이 독립정부 수립을 선포했고, 이후 한 달여 사이 북쪽 산시성부터 남쪽 윈난성까지 16개 성이 혁명에 동참했다. 난징이 함락된 것은 12월 2일이었다.

신해혁명의 주도권이 쑨원 중심의 난징파에게 넘어가고 우창봉기의 리더 황싱(黃興)은 공화정부의 육군부 총장이 됐지만, 불과 두 달 뒤 위안스카이의 반동으로 신해혁명은 미완의 혁명에 그쳤다. 혁명 100주년이던 2011년 개봉한 영화 ‘신해혁명’에서, 홍콩 반환 전 대영제국훈장(1989)을 받았고 반환 후엔 열렬한 친중파로 변신한 영화배우 청룽(成龍)은 ‘부르주아혁명’의 주역 쑨원이 아닌 혁명군 지도자 황싱 역을 맡았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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