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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남편은 ‘목숨 걸고 읽고 쓴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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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고 김윤식 교수 부인 가정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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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들을 오십, 육십 년 간직하셨어요. 김윤식 교수의 손때가 묻은 책들을 내가 한 번도 손대지 않고 넘기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았어요. 김윤식 교수에 대한 내 이별 형식이기도 하죠.”

지난 5일 서울 서빙고역 근처 자택에서 김윤식(1936~2018) 전 서울대 명예교수의 부인 가정혜씨를 만났다. 오는 25일이 고인의 1주기이다. 김 교수는 200권 이상 저술을 남긴 국문학계의 권위자이자 50년 가까이 국내에서 나오는 중·단편 소설을 거의 다 읽은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평론가였다.

아내는 두 달 전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현대문학 연구자 두 명과 함께 집에서 남편의 기증 도서 목록을 만들고 있다. “한 권 한 권 책을 타월로 닦고 책에 남편 이름을 새긴 낙관을 찍어요. 겉장이 떨어지거나 훼손이 심한 책은 비닐에 싸 따로 정리하고 있어요.”

그의 건강을 걱정하며 책을 그대로 박스에 담아 기증할 것을 권하는 이도 있었단다. “책을 보니 30% 정도는 메모가 있더군요. 책 사이 메모지나 자료도 있고요. 하나도 유실하지 않고 그대로 보내고 싶었어요. 이 사람의 모든 흔적을 하나도 손상하고 싶지 않았어요. 자료들이 누군가의 연구자료로 쓰였으면 해요.” 이런 선택이 남편이 원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남편은 집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서재 청소를 시키지 않았어요. 혹시 쪽지 메모를 버릴지 모른다고요. 상자째 넘기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대접이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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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지난 3월 15일 남편 유산 30억 원을 국립한국문학관(2022년 개관 예정)에 기부했다. 남편의 장서 기증 뜻도 밝혔다. “2001년 서울대 퇴직 때 트럭으로 책을 기증했어요. 지금 집에 있는 책들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그때그때 구할 수 없는 책들입니다. 오래된 책이나 1차 자료는 한국문학관에 보내고 요즘 나온 책들은 제자나 다른 곳에 주려고요. 일기도 몇 권 됩니다. 일기나 편지도 지극히 사적인 것을 빼고는 다 보내려고요. 육필 원고는 <김동리와 그의 시대>(1995) 등 두세 박스 됩니다.” 정리가 언제 끝날 것 같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내 건강이 좋지 않아 마음이 급해요. 하지만 올해 안에는 안 될 것 같아요. 집에 책이 만 권 정도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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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서재엔 유독 판형이 작은 문고판 일본어책이 많았다. “어디서든 읽기 편해서죠. 병원에 입원할 때도 문고판을 들고 가셨어요. 화장실이나, 공항에서도 줄을 서서 읽으셨죠. 그때 떠오르는 중요한 생각은 꼭 책에 메모했어요. 일본 와세다대 교수로 있는 남편 제자분이 서재를 보고 그래요. 남편이 온갖 분야를 다 섭렵했다고요. 이렇게 다른 분야의 책이 꽂혀 있는 것은 처음 봤다고요. 영화나 미술, 철학, 정신분석은 물론 무용에 대한 책도 있어요. 중국이나 노신에 대한 책도 너무 많아요.”

지난 3월에 내놓은 30억 원은 지금 사는 집을 뺀 그의 전 재산이다. “30억 원은 남편이 100% 원고지 칸을 메워 모았어요. 피를 말려 글을 쓰셨죠. 내가 함부로 쓸 수 없는 돈입니다. 문학관에 기증한 건 지금도 천배 잘했다고 생각해요. 이 집도 (추후) 기증할 겁니다. (기증처는) 지금 밝힐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 대략 생각은 하고 있어요.” 기증 결심을 두고 말을 이었다. “남편이 생전에 기증 생각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구체적인 이야기를 더 할 수 없었죠. 구체적인 기증 결정은 나 혼자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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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첫 저술은 박사 논문을 엮은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다. 아내가 가장 아끼는 책이기도 하다. “그 책을 위해 몇 년에 걸쳐 자료를 모은 걸 내가 잘 알아요. 누구도 그만큼 공부한 사람이 없어요. 정말 미련하게 했죠. 신혼 초 나도 방학일 때 둘이 고려대 도서관을 찾아 신문철을 뒤졌어요. (아내는 미술사 전공으로 대학에서 디자인을 가르쳤다) 그 사람이 신문철 대여섯개를 할 때 나는 한 개도 못해 쩔쩔맸어요. 그때는 신문밖에 자료가 없었어요. 그 사람이 발로 뛰어 흩어져 있는 한국 근대문학 자료를 다 정리했어요. 그게 김윤식의 공이죠. 그때 도서관이 매우 추웠다는 기억은 뚜렷해요. 남의 집에 살 때인데 방 네 벽에 갱지를 붙여 거기에 어느 신문 몇 페이지에 어떤 자료가 있다고 적어 놓고 다른 게 나오면 추가해 썼죠. 그 시절 남편이 청계천에서 잡지도 수북이 사 왔어요. 남의 집 살 때라 들고 다닐 수가 없어 가위로 한두 쪽 오려 원고에 붙이고 책이 나온 뒤에는 다 없앴어요. 지금 남았으면 국보급 자료일 겁니다.”

200권 저술가의 아내로 사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65년에 결혼하고 1년 안에 파악했어요. 남편은 절대 못 고친다고요. 그 사람의 직업 그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난 쉽게 포기해요. 남편은 자기 글 쓰는 것만 방해하지 않으면 다 좋다고 했어요. 놀자고만 하지 말라고요. 70, 80년대 서대문 주택에 살 때 그 사람 새벽 4시 전에 잔 적이 없어요. 학교에 출근하려면 막 하품을 해요. 오후 4시쯤 집에 와서는 한두 시간 자고 저녁 먹고 9시쯤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25일 남편 1주기 맞아 첫 언론 인터뷰
‘새벽 4시 전 잔 적 없고…피말려 쓰고’
“결혼 1년만에 ‘절대 못 고친다’ 인정”
고인 장서 기증하려 ‘도서 목록’ 작업중
“남편 손때묻은 책들 ‘낙관’ 찍어 대접”


유산 30억 이어 자택도 기부 뜻 밝혀

남편이 어떻게 기억되길 원하냐고 하자 “목숨 걸고 읽고 쓴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 사람이 직접 한 말입니다. 남편이 글을 많이 쓴 것은 타협을 안 해서죠. 삶에서 많은 것을 생략하고 건너뛰고 어떤 거는 무시하고 그랬어요. 목표가 하나 있으면 뭐든지 포기하고 살았죠. 매 순간 (쓸) 단어를 찾느라 온 신경을 집중했어요. 집중에 방해된다고 꽉 끼는 속옷도 피하셨어요.”

그는 지금 아파트에서 32년을 살았다. 꼭대기 바깥 층이다. 이유가 있단다. “남편이 아파트로 옮기는 것을 처음엔 반대했어요. 그러면서 조건을 내걸었죠. 옆과 위층에 누가 안 살아야 한다고요. (집중을 어렵게 하는) 소음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죠. 대신 벽돌담이 아파트 전망을 가리는 것은 괜찮다고 하더군요.”

아내는 4년 전 남편 팔순을 맞아 직접 저술 200권 전시회를 구상하고 꾸렸다. 이때 남편의 책 표지로 가로 140, 세로 140㎝ 패널 디자인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남편이 건강이 안 좋을 때였어요. 팔순을 맞아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사람의 책을 다 찾아 보여주고 싶었어요. 내 생각이었지만 내가 말하면 가까운 사이라 안 한다고 할 것 같아 제자들 제안이라고 했죠. 그때 단독저술 150여권을 포함해 번역서나 공저까지 저서 200권 목록이 나왔어요. 남편이 전시회는 물론 내가 만든 작품도 굉장히 좋아했어요. 의외였어요. 나쁘다는 말은 해도 좋다, 만족한다, 잘한다는 말은 잘 하지 않았거든요. 작은 사이즈로 만든 그 패널 작품을 직접 서재에 붙이기도 했어요. 일생 자기가 한 것을 정리해 준 게 고마워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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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추모사업이나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상 제정도 하지 말라고 했단다. “명예욕일 뿐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어요. ‘내 책이 두고두고 후세에 평가받을 때 내 가치가 평가받는다’는 생각이었어요.”

고인의 지독한 글쓰기 욕망의 원천을 궁금해하자 아내는 이렇게 답했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문학을 지망했어요. 문학적 소양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결혼 뒤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응모도 했죠. 남편이 초고를 쓰고 내가 원고지에 베껴 냈어요. 떠나기 전까지 오리지널 창작을 하지 못한 것을 많이 아쉬워했어요. 가기 전까지 꼭 하려고 했어요. 남편이 병상에서 의식을 잃고 꽤 오래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동생이 나한테 그래요. 누워 자기 작품을 쓰고 계실 것이라고요. 대신 10권 이상 낸 예술기행으로 창작 욕구를 해소하셨죠. 단순한 여행기가 아닙니다. 자기표현의 유일한 숨통이었죠.”

남편은 전공인 근대 문학 연구를 위해 70년대와 80년대 두 차례 일본에 체류했다. “미국에도 있었죠. 하지만 미국은 할 게 없어 못 있겠다고 하더군요. 이인 초대 법무부 장관의 아들인 이옥(1928~2001) 파리7대학 교수가 김윤식 최대예찬자였어요. 그분이 몇달이라도 파리에 와서 강의해달라고 수차례 요청했지만 결국 못 갔어요. 몇달 한국을 비우면 공백이 생긴다는 이유에서죠. 매달 나오는 작품을 읽지 못해 한국 문학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고요.”

남편의 교우 관계를 묻는 질문에 아내는 “친구가 없었다”며 몇 이름을 떠올렸다. “60년대에 고은씨와 친했고 고인이 된 김현 문학평론가, 최인훈 작가와도 친했죠. 최인훈 작가가 대학 졸업장 없이 서울예대 교수로 취업할 때 남편이 최 작가가 누구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추천장을 써주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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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여행을 좋아했다. 외국에 학회가 있을 때는 부부가 함께 여장을 꾸리기도 했단다. “언젠가 파리 호텔에 머물 때 아침을 먹고 근처 노트르담 성당까지 산책하는데 남편이 매번 다른 길로 가더군요. 시각적 경험이 생각에 많은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었죠. 시각, 청각적 경험이 남편 글쓰기의 기본 루트(경로)였어요.”

남편은 6년 투병하고 세상을 떴다. “남편이 병마와 싸우는 동안 남이 한 밥을 한 번도 남편에게 주지 않았어요. 남편이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게 투병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죠.” 덧붙였다. “남편은 늘 자신이 나보다 먼저 떠나야 한다고 말했어요. 사후 정리를 해야 하는데 자기는 못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자기가 죽으면 화장해 유골을 북한강에 뿌리라는 말도 하더군요. 언젠가 남편이 한강 유람선을 타고 싶다고 해서 7년 전에 제자 부부와 함께 한번 탔어요. 북한강 강물이 흐르며 서빙고 자기 집을 볼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 했죠. 그 말에 눈물이 나더군요.”

시아버지는 아들이 교장 선생님이 되기를 바랐다. 왜 사범대(서울대 국어교육과)를 갔느냐고 기자들이 물으면 남편은 늘 아버지의 바람을 먼저 내세웠다. 시부는 아들이 국립대 교수가 되는 걸 보셨을까. “아뇨. 하지만 교사가 되는 것은 보셨어요. 인천사범학교 교사 시절인 66년에 돌아가셨어요.”

긴 인터뷰는 아내의 다음 말로 마무리됐다. “남편 책을 본 어떤 일본 교수는 남편 자료만 가지고도 논문을 쓰겠다고 해요. 김윤식 교수 저술의 배경을 밝히는 논문을 쓸 수 있다는 거죠. (남편이) 이청준 소설가 자료도 많이 모아 두었더군요. 따로 작가론을 쓰려고 했던 것 같아요. 최근 한양대 정민 교수 책을 보니 다산 제자 황상이 스승의 쪽지만 가지고 책을 냈다고 해요. 내가 지금 하는 (자료 정리) 접근법이 맞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되었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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