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우지경의 여행 한 잔] 오스트리아의 가을은 사슴과 함께 시작된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지금 사슴이 제철이에요. 사냥꾼이 잡은 야생 사슴으로 만든 요리 드셔 보실래요?"

이 말은 만일 당신이 가을에 오스트리아를 여행한다면 레스토랑에서 늘 듣게 될 멘트다.

볼프강 호숫가의 동화 같은 마을, 장크트 길겐(St.Gilgen)에서도 어김없이 사슴이 제철이란 말을 들었다. 장크트 길겐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추천한 비르트 암 그리스라는 레스토랑에서였다. 궂은 날씨에 케이블카를 타고 츠뵐퍼호른(Zwolferhorn)까지 다녀오느라 고단한 저녁이었다. '12개 산봉우리'라는 뜻인 츠뵐퍼호른은 옥빛 볼프강 호수를 병풍처럼 두른 알프스산맥이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튀어나온 듯 빈티지한 4인용 케이블카를 타고 15분 만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어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맛있는 음식으로 피로를 풀고 싶었는데 오늘도 추천 메뉴가 사슴이라니. 친절한 주인장은 쾌활한 목소리로 펌킨&진저 수프와 사슴 스튜는 꼭 맛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메뉴판에 등장한 구원투수가 있었으니, 그 이름도 강렬한 츠바이겔트(Zweigelt)였다. 레드와인 리스트 맨 위에 적힌 츠바이겔트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적포도 품종이란 걸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따끈한 펌킨&진저 수프로 속을 데우고 츠바이겔트를 홀짝이며 식사를 시작했다. 과일 향이 입안에 우아하게 번졌고, 탄닌이 부드러워 목 넘김도 편했다. 사슴 스튜와도 잘 어울렸다. 어디선가 '오스트리아=화이트와인의 나라'라는 편견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게다가 아직 맛보지 못한 레드와인이 훨씬 많다는 게 즐겁기만 했다.

돌아온 후에야 알게 됐다. 츠바이겔트는 1922년 츠바이겔트 박사가 블라우프란키슈(Blaufrankisch)와 생로랑(St Laurent)을 교배해 만들었으며, 품종명은 박사 이름에서 따왔단다. 이 자리를 빌려 츠바이겔트 박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박사님 덕분에 사슴고기를 맛있게 잘 먹었노라고.

[우지경 여행작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