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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금)

바우하우스는 하나의 이념이었다(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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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의 Triadic Ballet /사진=유튜브(https://www.youtube.com/watch?v=r4pJlj_bteQ)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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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미술기행-23] 바우하우스는 건축을 주축으로 삼았지만 모든 예술의 통합을 목적으로 도시 계획, 회화, 조각, 공업 디자인 등 모든 시각 예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무대 예술은 조각가 이기도 한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1888~1943)를 중심으로 인간, 공간, 기계가 조화를 이루는 무대의 역동적인 역할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오스카 슐레머는 무용과 음악, 의상 세 가지 요소를 결합해 교향악적, 건축적 구성의 작품 '삼부작 발레 Triadic Ballet'를 발표했다. 무대에는 세 명의 무용수가 등장하여 12편의 춤과 18벌의 의상을 입고 춤춘다.

몸을 악기 삼아 모든 감각을 일깨우도록 했다. 학생들은 반원과 일자 스틱 같은 도구를 활용해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여 무대에서 각자 자신만의 동작을 연구했고, 이를 응용해 전위적 댄스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바우하우스에서 펼쳐진 무대 예술이 1960~70년대 독일에서 일어난 반예술·실험적 미술운동인 백남준이 참가한 '플럭서스'의 기반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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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체어(Wassily Chair) /사진=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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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사우에서 칸딘스키는 가구 공방의 마이스터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1902~1981)에게 의자 제작을 의뢰했다. 브로이어는 자전거에 주로 쓰이는 강철관(tublar steel)에 캔버스 천을 팽팽하게 연결한 의자를 완성했다. 이를 칸딘스키 성을 따 '바실리 체어(Wassily Chair)'라고 이름 붙였다. 원래 이름 '모델 B3'인 바실리 체어는 명징한 조형감, 새로운 소재가 주는 신선함, 효율성을 놓치지 않은 제품이었다.

바우하우스 데사우는 '디자인 스쿨'이라는 명칭을 얻었으며 정식 대학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형태와 공방 교육자로 나뉘었던 체제가 사라지고 교육자들은 교수로 불렸다. 바우하우스 데사우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1927년 건축학과의 개설이다. "모든 창조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이다"고 주장했던 그로피우스의 선언처럼 마침내 바우하우스 이념을 실천할 수 있었다. 1928년에 그로피우스는 교장직에서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스위스 바젤 출신의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 1889~1954)를 임명하였다. "예술가란 수공업을 배우고 익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그로피우스의 이상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마이어는 실용성을 높인 건축 설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의 바우하우스에서 심미적 요소를 걷어낸 극단적 기능주의와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급진적 성향은 국가주의 건축을 지향하던 나치와 공존할 수 없었다. 1930년 데사우시는 그를 해임한다.

1930년 8월 교장으로 부임한 루드비히 미스 반데어로에는 정치적 성향을 씻어내는 데 집중했다. 미스 반데어로에는 자신의 국제적 명성을 활용, 건축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재편했으며, 순수 미술보다 공업 생산에 맞추도록 교육 체계를 고쳤다. 순수미술 분야 교육자들이 심하게 반발했다. 바우하우스는 1932년 나치에 장악된 데사우 시의회 결정으로 문을 닫았다. 1933년 학교는 나치에 점거되었다. 학교 존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스 반데어로에는 바우하우스 해산을 결정한다.

이후 교수와 학생들은 프랑스, 미국, 스위스 등으로 흩어진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영국을 거쳐 1937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바드 건축디자인대학원 교수로 재직한다. 대표작으로는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구 팬암 빌딩(Pan Am Building)인 메트라이프 빌딩(MetLife Building)이 있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시카고에 뉴바우하우스를, 마르셀 브로이어는 1941년 독립하여 뉴욕으로 진출했다.

미스 반데어로에는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해 시카고에 있는 '아머공과대학'과 '일리노이공과대학교(IIT)' 교수를 역임했다. 대표 작품으로는 1958년 156.9m 높이의 뉴욕의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이다. "더 적은 것이 더 많다(Less is More)"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건축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대표자가 되었다.

바이마르의 유산이 미국에 전파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블랙 마운틴 칼리지(Black Mountain College)의 예술가들이었다. 바우하우스 교사 출신인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 1888~1976)는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블랙마운틴 칼리지 미술학과 과장을 맡아 유럽의 전위미술과 바우하우스 사상을 전파하였다.

요제프 알베르스는 미국 팝 아트의 선구자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 )를 길러냈다. 블랙마운틴에서는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 등이 교편을 잡았다. 1957년 블랙마운틴 칼리지는 문을 닫아야 했다. 냉전의 바람이 불 때 이곳 사람들 중 일부가 공산주의 추종자라는 의심을 받으며 스폰서들을 잃은 결과였다.

바우하우스 데사우에서 공부하였던 화가, 조각가, 건축가이며 주방용 벽시계와 손목시계 디자인으로 명성을 떨친 스위스인 막스 빌(Max Bill, 1908~1994)은 바우하우스 정신을 잇는 '울름조형학교(Hochschule fur Gestaltung Ulm, 1953~1968)'를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공업도시 울름에 설립하였다. 기술과 예술의 통합, '환경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며 독일 전자업체 브라운과 손잡았다.

한스 구겔로트(Hans Gugelot·1920~1965)는 브라운사 디자인에 울름학교 이론을 도입해 기능적이고 딱딱한 디자인을 했고, 디터 람스(Dieter Rams, 1932~)는 여기에 풍부한 조형적 개성을 투사하였다. 디터 람스는 애플의 아이폰 디자인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우하우스는 14년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모던 디자인의 시작을 알렸다.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 모든 예술 분야를 통합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꾼 바우하우스의 총체적 예술 개념은 오늘날까지 문화 예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페터 베렌스' 사무실 출신의 르 코르뷔지에는 1965년, 발터 그로피우스는 1969년, 미스 반데어로에는 1969년 각각 타계했다. 건축사의 거인들은 생의 마감까지 거의 비슷한 시간대를 살았다.

※참고=금호미술관 전시 <바우하우스와 현대 생활> 자료, 영화 <바우하우스, 100 years of BAUHAUS>,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중앙선데이), 월간디자인 2019년 3월호, 독문학자 서장원 칼럼, 웹사이트 : bauhaus.de bauhaus-dessau.de

[심정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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