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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수출규제 철회 거듭 요청했지만…日 꿈쩍않자 韓 예고대로 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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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TO 제소' 칼 빼든 韓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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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일본의 무역보복 조치 이후 두 달여간 별러왔던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카드를 꺼내들었다. 일본은 지난 7월 4일부터 반도체 3개 소재에 대한 1차 수출통제 조치에 이어 지난달 28일부터는 2차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조치까지 강행했다. 정부의 거듭된 철회 요청에도 일본 정부가 꿈쩍 않고 '마이웨이' 행보를 이어가면서 정부도 마지막 카드인 국제 소송전에 나선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직격탄을 맞은 국내 소재·부품·장비 산업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과 함께 맞대응 조치로 일본산 식품과 폐기물 안전조치는 물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까지 선언했다. 일본의 2차 조치에 맞서 일본을 수출우대국에서 배제하는 조치도 다음주 시행할 예정이다.

정부는 3가지 WTO 협정 위반을 제소 사유로 제시했다. 우선 일본이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에 대해 수출통제 조치를 취한 것은 오직 한국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1조인 최혜국 대우를 위반했다는 입장이다. 최혜국 대우는 모든 수출입과 그와 관련된 관세나 과징금이 WTO 회원국 간 차별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조항이다. 일본은 한국으로 수출하는 3개 품목에 대해서만 종전 포괄허가제에서 개별허가제로 전환했다. 통상 1~2주면 받을 수 있었던 수출허가를 이젠 최장 90일을 기다려야 한다.

정부는 또 일본의 조치가 GATT 11조인 수량제한 금지 규정도 어겼다는 입장이다. 수출입에서 할당제나 수출입 허가를 통해 수량을 제한할 수 없는 규정이다. 일본 정부는 이전까지 자유롭게 교역하던 품목을 계약별로 개별허가를 받도록 한 데다 자율준수(CP) 기업을 통한 포괄허가도 원천 봉쇄했다.

일본은 7월 4일 조치 시행 이후 69일이 지난 현재 단 3건의 한국행 수출만 허가해줬다. 이들 품목의 일본산 비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당장 대체처 확보도 어려운 실정이다. 3건의 수출허가도 첫 번째는 조치 시행 이후 34일 만에, 뒤이어 45일과 56일 만에 허가가 이뤄졌을 만큼 들쭉날쭉했다.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극심한 불확실성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는 일본의 조치가 정치적 이유로 교역을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것으로 무역규정을 일관되고,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GATT 10조도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일본 정부는 7월 1일 조치를 발표한 뒤 한국과 아무런 협의 없이 불과 사흘 만인 4일 조치를 단행했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웃 나라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보여주지 않았음은 물론 절차적 정당성도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정부의 주장에 대해 일본은 정당한 수출관리라는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특히 일본은 국가안보 위협 등이 있을 경우 수출입 수량제한이 가능하다는 GATT 21조를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과거 사례도 있다. 지난 4월 WTO 분쟁패널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취한 수출제한 조치가 안보상 예외조항에 해당한다며 러시아 손을 들어줬다. 당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가안보 예외조항이 인정됐다는 게 우리 정부 입장이다.

정부는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한 조치는 이번 제소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정부 역시 일본을 수출우대국에서 제외하는 맞불 조치를 시행하기로 한 만큼 일본의 2차 조치를 제소하기엔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다.

전문가들의 전망은 엇갈린다.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 박태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수출을 금지하는 직접 규제가 아니라 허가절차를 강화한 것이어서 다툼의 여지는 있지만 다른 국가와 비교해 차별 조치는 명확하니 제소의 의미는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WTO 규정상 안보를 이유로 한 협정 불이행은 허용이 되고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아도 된다"며 "우리 정부의 승소 가능성은 낮다"고 우려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정부로선 국제 여론전을 위한 조치로 꺼내든 것인데 국내 기업들의 피해가 명확하지 않은 데다 일본 조치 철회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며 "오히려 양국 간 긴장관계만 심해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WTO 제소의 실효성도 문제다. 당장 일본과 양자협의에 60일이 걸린다. 양국 간 합의가 무산될 경우 30일 내 1심 재판부인 분쟁패널이 설치된다. 패널 심리는 양국과 제3국이 참여한 가운데 6개월이 소요된다. 최대 기한은 9개월이다. 1심 판결인 패널보고서가 채택된 뒤에도 일본이 상소기구에 상소할 경우 심리에만 최장 90일이 걸린다.

정해관 산업부 신통상질서협력관은 "분쟁패널은 평균 15개월 정도 걸리고, 상소심까지 갈 경우 2~3년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일 간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은 상소심을 거쳐 4년 만에 최종 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게다가 연말이면 상소기구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 총 7명의 상소위원 중 현재 4명이 공석이다. 남은 3명 중 2명의 임기도 12월에 만료된다. 현재 미국이 WTO 상소기구 개편을 주장하며 위원 선임에 반대하고 있어 상당 기간 상소기구 부재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

역대 한일 간 WTO 분쟁은 총 6건이다. 이 중 공기압 밸브와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을 포함해 4건에서 승소했다.

[임성현 기자 / 최희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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