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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여행] '땅끝'에서 풍류(風流)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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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 인문학 기행

고산 윤선도 집안 예술혼 담긴 '녹우당'

윤두서의 자화상도 전시관에 보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대흥사'

초의선사 다도 정립한 '일지암'

이데일리

우수영관광지에서 바라본 울돌목과 진도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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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전남 해남에서 가장 이름난 곳은 ‘땅끝’이다. 땅끝의 유명세로 해남군이 행정지명을 해남군 이서면 갈두리에서 아예 ‘땅끝리’로 바꾸었을 정도다. 그만큼 ‘땅끝’이라는 명성은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장엄하고 엄숙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해남에는 ‘땅끝’에 가려진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다. 이순신의 명량해전의 현장인 울돌목이 있고, 녹우당에는 고산 윤선도의 자취가, 윤두서가 살았던 고택도 있다. 여기에 기기묘묘한 산세의 달마산과 두륜산도 있다. 이 산에 깃든 절집인 미황사와 대흥사도 있고, 암봉 끝에 매달린 도솔암의 빼어난 정취와 차향 그윽한 일지암도 바로 이곳 해남 땅에 있다. 화선지와 한지에 먹으로 그려낸 한 폭의 수묵화를 바라보듯 소박하고, 포근한 해남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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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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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사 최고의 자화상과 마주하다

매섭게 올라간 눈꼬리,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한 올 한 올 셀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진 수염. 300여년 전 조선의 한 선비가 종이에 그린 자화상이다.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자신을 그린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이다. 한국 미술사에서 자화상은 물론 초상화, 나아가 회화사에서도 걸작 중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 작품과 윤두서의 이야기가 바로 해남 땅에 있다. 조선 시대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인 해남윤씨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사적 167호·전남 해남군 해남읍) 인근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윤두서가 바로 윤선도의 증손자여서다. 유물전시관에는 윤두서의 자화상이 걸려 있다. 진본은 수장고에 들여놓고, 모사본만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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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의 초상화 영인본


해남읍에서 산삼벌을 가로질러 대흥사 쪽으로 3km쯤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고산 윤선도 유적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서 1.4km가량 더 들어가면 고산 유적지와 고산이 살았던 녹우당 고택이다. 연동마을 맨 안쪽 덕음산 자락에 안긴 집이다. 매표소에서 50m쯤 올라가면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이다. 이곳에서는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등이 남긴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다. 고산의 ‘금쇄동집고’(보물 제482-1호), ‘산중신곡’(山中新曲, 보물 제482-3호)과 공재의 ‘자화상’과 윤용의 ‘미인도’, ‘해남 윤씨 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 고려 공민왕 때 노비 상속 증서인 ‘지정 14년 노비문서’(보물 제483호) 등 해남 윤씨가 남긴 유물과 고문서, 그림 등 25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고산이 대종을 잇기 위해 양자가 되는 것을 예조에서 허락한 ‘고산양자 예조입안’(보물 제482-5호), 고산이 거문고 제작법과 사용방법을 수록한 ‘회명정측’과 이를 토대로 제작한 거문고는 흥미롭다. 공재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했다는 거울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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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툇마루에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는 관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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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간 자리 지킨 ‘녹우당’

전시관을 나와 50m쯤 올라가면 녹우당이다. 입구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무려 500년을 녹우당을 지키고 있는 나무다. 푸를 녹(綠) 자에 비 우(雨) 자를 쓴다. 말 그대로 ‘초록비’라는 뜻이다. 바람 불면 집 뒤 비자나무에서 우수수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덕음산과 고택, 은행나무가 어우러지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녹우당은 사실 고택의 사랑채를 이르는 말이지만, 지금은 사랑채뿐만 아니라 고택 전체를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녹우당은 윤선도가 수원에 살 때 효종이 스승이었던 그에게 하사한 집이다. 윤선도가 82세 되던 해 낙향하면서 수원의 집을 뜯어 배로 싣고 와서 이곳 해남에 다시 지었다. 지어진 내력 못지않게 집에 얽힌 이야기들도 많다. 이 집의 별당에서 다산 정약용이 태어났고, 자화상으로 유명한 증손 공재 윤두서가 학문과 예술을 키웠으며 소치 허유 등 당대의 쟁쟁한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했다. 한때 99칸에 달했다던 고택은 55칸만 남아있지만, 여전히 윤선도의 14대 손이 집을 지키면서 정갈하게 집을 간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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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과 500년된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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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대표적인 건물인 사랑채가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녹우당이 서쪽을 향해 앉아 있다는 점이다. 건물 바깥쪽의 긴 지붕 회랑도 오후의 따가운 볕이 툇마루까지 드는 것을 막기 위해 달아놓은 것이다. 녹우당을 나와 덕음산 쪽으로 돌담을 따라가면 고산사당이 있다. 고산사당에서 발걸음을 옮겨 어초은·윤호정 사당을 지나 초록빛 나무가 울창한 숲길 안쪽으로 들어서면 해남 윤씨 번성의 기틀을 닦은 어초은의 묘가 자리한다. 녹우당이나 마을에서 덕음산 중턱을 보면 그늘이 드리운 듯 유독 진한 초록빛 나무 무리가 눈에 띈다.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며 고산이 사철 푸른 비자나무를 심은 것이 현재 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을 이룬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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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가 머문 암자인 일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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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선사가 끓인 차향 가득한 일지암

녹우당을 나와 대흥사로 향했다. 대흥사는 지난해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찰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절집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해탈문을 들어서자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편안하게 누운 부처님 품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대흥사를 둘러싼 두륜산의 두륜봉과 가련봉, 노승봉이 비로자나불상의 머리와 손, 발처럼 솟아 있기 때문이다.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일까. 대흥사는 조선 후기 대종사(大宗師)와 대강사(大講師)를 13명씩 배출한 사찰로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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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암 숲속도서관 다도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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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의 유서 깊은 역사는 사찰 입구부터 만날 수 있다. 50여기에 이르는 부도가 모여 있는 부도림이 삼나무 숲길 끝과 사찰 입구 사이에 있다. 서산대사(1520∼1604)와 연담유일(1720∼1799), 초의선사(1786∼1866) 등 조선을 대표하는 스님들의 부도가 가득하다.

대흥사는 조선 정조 때부터 특히 번창했다. 정조는 사육신과 단종의 복위 등 역사 바로 세우기에 적극적인 군주였다. 당시 승려들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서산대사를 기려 달라고 청원했다. 정조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대흥사에 친필 편액을 내린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게 했다. 금빛 글씨로 쓰인 표충사 내부에는 독특하게도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처영 스님의 영정과 함께 유교식 신줏단지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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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대웅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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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자락에는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일지암이 있다. 초의선사는 차 이론서인 ‘동다송’(東茶頌)을 집필하는 등 조선 후기 차 문화를 이끈 인물. 다산 정약용(1762∼1836)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같은 당대 최고의 문인과 폭넓게 교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의선사와의 인연으로 추사는 ‘무량수각’(無量壽閣) 등 대흥사 곳곳에 현판을 썼다. 무량수각 바로 옆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가 걸려 있다. 수려하면서도 세련된 글씨체를 자랑한 추사는 생전에 “조선의 글씨를 망친 게 이광사”라며 향토적 색채가 짙은 원교의 글씨를 비난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화해라도 한 듯이 두 현판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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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부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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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팁= 녹우당과 대흥사, 일지암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지원하고 행촌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전통문화 체험관광 ‘남도 수묵기행’ 코스에 포함돼 있다. 1박 2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울돌목, 백련사, 다산초당, 미황사, 달마고도와 해남 땅끝까지 방문한다. 9월에는 3차례 기행을 예정하고 있다. 20명 이상 운영하고 교통, 숙박, 3회 식사, 일지암 차 시음과 판소리 공연까지 포함이다. 자세한 사항은 행촌문화재단으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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