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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IF] '멸종위기' 바나나, 유전자 가위가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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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가 식품 매장에서 사라질 날이 다가오고 있다. 1989년 대만에서 창궐해 바나나 70%를 말라 죽게 한 곰팡이가 최근 바나나 최대 수출 지역인 중남미까지 퍼진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곰팡이가 발견되고 나서 전염을 막아낸 국가는 없다. 과학자들은 바나나의 유전자를 바꿔 곰팡이에 저항력을 가진 신품종을 개발하고 있지만 상용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바나나를 멸종에서 구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30년 만에 아시아에서 남미까지 번져

콜롬비아 농업연구소(ICA)는 지난 8일 학명(學名)이 '푸사리움 옥시스포룸'인 곰팡이의 열대 품종4(TR4)가 자국 바나나 농장에 감염된 것을 공식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연구소는 지난 6월 북부 농장 4곳이 TR4에 감염된 것으로 보고 바나나 조직을 네덜란드로 보내 유전자를 분석했다. 콜롬비아 정부는 TR4 곰팡이가 이미 바나나 농장 1.75㎢ 면적에 퍼졌다고 추정했다.

TR4 곰팡이는 바나나에 치명적인 파나마병을 유발한다. 곰팡이가 뿌리로 감염되면 물과 영양분이 오가는 관을 막아 바나나 잎이 누렇게 시들어 죽는다. 1950년대 다른 계통인 TR1 푸사리움 곰팡이가 파나마에서 창궐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던 바나나인 그로 미셸 품종을 사실상 시장에서 퇴출시켰다. TR4 곰팡이는 그로 미셸의 후계자인 캐번디시 품종 바나나를 공격한다.

조선비즈

그래픽=백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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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4는 그동안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2013년 중동의 요르단까지 퍼졌다. 2015년에는 호주와 아프리카 모잠비크, 바나나 최대 생산국인 인도에서도 발견됐다. 이번에 TR4 곰팡이가 처음 발견된 중남미 지역은 전 세계 바나나 수출물량의 80%를 생산한다.

푸사리움 곰팡이는 어떤 농약도 듣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차단하는 방법밖에 없다. 콜롬비아 정부는 TR4 감염 의심 사례가 발견되자마자 농장 주변 11㎢ 지역에서 차량과 사람의 출입을 차단했다. 곰팡이는 감염된 바나나는 물론이고 곰팡이 포자(胞子)가 들어 있는 물과 흙으로도 감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국가도 TR4가 발견된 후 전염을 막지 못했다.

유전자 교정 통해 곰팡이 저항종 개발

과학자들은 곰팡이를 막을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네덜란드 바헤닝언대의 거트 케마 교수는 곰팡이 포자를 죽이는 방법을 개발했다. 푸사리움 곰팡이는 땅에서 30년간 생식세포인 포자 상태로 유지돼 방제가 어렵다. 연구진은 바나나 농장의 토양에 특수 생체 물질을 추가하고 비닐로 덮었다. 이 물질이 분해되면서 나온 유독 가스가 곰팡이 포자와 세균을 죽인다. 필리핀의 바나나 농장에서 상당한 효과를 확인했다.

장기적으로는 곰팡이에 내성(耐性)을 가진 신품종이 필요하다. 호주 퀸즐랜드 공대의 제임스 데일 교수는 2017년 야생 바나나에서 찾은 유전자를 추가한 캐번디시 바나나가 3년간 TR4 곰팡이를 이겨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유전자변형농산물(GMO)에 대한 소비자의 반감을 고려해 최근에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곰팡이 내성을 부여하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DNA에서 특정 유전자를 자르고 붙일 수 있는 효소 단백질이다. 외부 유전자를 주입하지 않고 자체 유전자로 교정한다는 점에서 GMO와 다르다. 데일 교수는 2023년이면 신품종의 상용화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역시 시장에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지난해 유럽사법재판소는 유전자 교정으로 만든 농작물도 GMO와 같은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판결해 시장 진출이 더 어려워졌다. 과학자들은 결국 바나나 생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질병을 이겨낼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나나는 19세기 이후 껍질이 단단해 장거리 수송에 적합한 그로 미셸 품종이 개발되면서 수출품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로 미셸이나 그 후계자인 캐번디시 모두 씨가 없어 뿌리줄기를 잘라 번식시킨다. 바나나는 모두 유전자가 똑같은 복제물인 셈이다. 유전적 다양성이 없는 생물은 치명적인 질병 하나로 순식간에 멸종 위기를 맞는다.

과학자들은 세계 곳곳에 있는 다양한 야생 바나나를 상품화하면 단일 품종, 대량 생산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다. 야생 바나나 중에는 여전히 씨를 가진 종류도 있다. 씨앗을 뿌려 키우면 꽃가루받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y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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