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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복세편살]“어디에나 하나쯤 있지 않나요?”···브랜드가 된 ‘○리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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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리단길’ 상권 20여 개···지자체도 나서서 홍보

“재화 아닌 ‘경험’ 소비하는 요즘 세대 특성이 반영된 것”

젠트리피케이션 등으로 ‘반짝 상권’ 되지 않으려는 노력도 필요해

서울경제


잠실 ‘송리단길’, 수원 ‘행리단길’, 해운대 ‘해리단길’, 경주 ‘황리단길’, 전주 ‘객리단길’···

전국적으로 ‘○리단길’ 열풍이 무섭습니다.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거리들은 20~30대에게는 ‘핫플레이스(핫플)’로 불리지만 중장년층에게는 다소 생소한데요. 어쩌면 중장년층에게 생소한 것은 이 지역이 아니라 이러한 작명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리단길’은 마치 돌림자를 쓰며 ‘나는 경리단길이랑 형제요’라고 말하는 듯 하니까요.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리단길’이라는 명칭이 붙은 상권은 20개(2018년 9월 기준)에 달합니다. 지금까지 지명이 브랜드처럼 활용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상권의 이름이 복제품처럼 수십 여 개가 생겨나는 현상은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산, 전주, 경주 등 국내 유명 여행지라면 하나씩 자리 잡은 ‘○리단길’의 유행 비결은 무엇일까요?

■“접근성 떨어져도 ‘개성’ 있으면 핫 플레이스”

‘○리단길’ 열풍의 원조는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입니다. 경리단길은 지난 2012년 국군재정관리단으로 통합된 육군중앙경리단이 있던 데에서 유래됐는데요. 인근에 위치한 미군부대 영향으로 회나무로를 따라 일찌감치 외국인들의 주거단지로 자리 잡은 경리단길은 이들의 취향에 맞는 이국적인 카페·옷 가게·음식점 등이 들어서며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그러다 2014년 각종 방송에서 경리단길을 소개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연예인 홍석천 씨가 이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들려오는 유명 연예인들의 목격담도 경리단길의 인기에 한몫 했습니다.

사실 경리단길은 상권으로서 좋은 입지는 아닙니다. 지하철역서 거리가 먼 데다 언덕이고 길도 좁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이러한 불편함을 무릅쓰고도 경리단길에 손님들이 많았던 이유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과 이야기를 가진 가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전국 ‘○리단길’들은 경리단길의 이러한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마치 빌딩 속 둘러싸여 있는 작은 섬과 같은 이미지를 주지요. ‘○리단길’의 조건은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지 않지만 작고 개성적인 카페, 이국적인 음식점 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가게만의 개성적인 인테리어는 필수죠. 이곳에서 프랜차이즈는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다. ‘○리단길’만의 독특한 분위기 지닌 상점들은 기존 판에 박힌 가게들에 질린 20~30대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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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해리단길은 옛 해운대역사 뒤편의 상권을 부르는 명칭입니다. 공식적인 행정명칭은 아니지만 지난해 부산시가 10대 히트상품으로 선정했을 정도로 인기 있는 명소입니다. 해리단길의 매력은 ‘이질감’입니다. 통상 복잡하다고 느껴지던 부산의 관광지에서 철길 하나만 넘어서면 한적함을 만날 수 있는데요. 대부분 2층 높이의 주택들로 이뤄져 있으며 주택 사이에 가게들이 퍼져있어 찾아가려면 주택과 골목을 헤집고 다녀야 합니다. 경주에 위치한 황리단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주의 단일고분 중 가장 큰 규모인 봉황대 부근 카페거리를 황리단길이라 부르는데요. 주변에 위치한 교촌 한옥마을과 함께 경주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로 불리고 있습니다.

‘○리단길’ 인기에 지자체가 나서서 상권을 만들고 홍보하는 경우도 생겨났습니다. 잠실·석촌·송파나루 역 부근에 위치한 ‘송리단길’ 입니다. 바로 근처에 있는 방이 먹자골목과는 사뭇 다른 아기자기한 분위기인데요. 이곳에는 프랑스 가정식 전문점부터 퓨전 분식집까지 이른바 ‘인스타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득합니다. 관할 지차제인 송파구청은 ‘송리단길’ 입구에 맛집 투어 지도를 배치해 지역 상권 활성화에 나섰습니다. 게다가 이 지도를 영어, 중국어, 일본어판까지 만들어 해외 관광객 유치에도 공을 들였지요. 송파구에 거주하며 송리단길의 유행 과정을 지켜본 대학생 김아름(24) 양은 “처음 송리단길이 생겼을 때는 억지로 유행 대열에 합류시키는 것 같았지만 가게들이 점점 생겨나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하나의 명소로 자리 잡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전에는 잠실 롯데월드 몰에만 사람이 몰렸다면 이제는 송리단길에도 사람이 많이 몰린다”면서 “주말에는 곳곳에 웨이팅이 있을 정도”라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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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를 소비했던 이전 세대 VS ‘경험’을 소비하는 요즘 세대

이 같은 ‘○리단길’ 열풍과 관련해 임혜빈 광운대 산업심리학과 교수는 “경험을 소비하는 데 높은 가치를 두는 젊은 세대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분석합니다. 임 교수는 “이전 세대의 소비가 ‘특정 재화를 소유하기 위한 소비’였다면 요즘 20~30대는 ‘특정 공간에서 특정 경험을 하는 소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소비가 경험으로 확장되면서 소비 공간 자체에 매력을 갖는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리단길’과 같이 공간에 이름을 붙이는 유행이 시작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의 활성화도 이들의 만족감을 높여주는 데 한 몫 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경험이 SNS를 통해 타인에게 공유되고 인정받는 과정에서 만족감을 높여 주는 것이죠.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SNS, 체험 경제 등 소비 트렌드 역시 이러한 ‘○리단길’상권의 성장에 기여했다”고 말합니다. 모종린 교수는 “SNS와 위치기반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마케팅에 투자하기 어려운 작은 가게도 독특한 콘텐츠로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는 몇십만 개에 달하는 ‘○리단길’ 태그가 유행하고 ‘리단길 투어’라는 해시태그도 생기기도 했습니다.

골목이든 아니든, 빈티지든 아니든 그곳에서의 소비 경험이 만족스럽다고 느껴지는 장소를 하나의 상권으로 인식하는 20~30대에게 ‘○리단길’은 그들을 만족 시킬만한 브랜드 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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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단길’, 단명 상권 되지 않으려면···”

일각에서는 ‘○리단길’이 단명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옵니다. 대규모 자본 없이 형성된 ‘○리단길’에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면서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라는 지적인데요. 실제로 ‘○리단길’의 원조 이태원 경리단길은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란 도시재생사업 등을 통해 유동인구가 증가하고 상권이 되살아나면서 임대료가 급등해 원주민과 영세상인 등이 다른 곳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말하지요. 지난해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 조사에 따르면 이태원 주변 임대료는 2015년부터 2년간 10.16% 증가했습니다. 서울시 평균(1.73%)의 6배 달하는 수치인데요. 또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이태원이 21.6%로 명동(6.4%), 종로(5.3%), 강남대로(2.6%)보다 높았습니다.

최근 경리단길의 상황에 대해 전문가들은 ‘SNS 입소문’이 만든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예라고 분석합니다. 마강래 중앙대학교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갑자기 인기가 높아진 상권 내 건물주들은 상인들이 버틸 수 있는 임대료 수준을 정확히 몰라 선을 넘는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마강래 교수는 “이러한 메커니즘이 작용하면 ‘○리단길’에는 공실이 늘어날 것이고 결국 상인들이 장사할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라며 “개별 건물주들이 나무가 아닌 숲을 보고 임대인과 임차인 간 상생협약을 맺는 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대규모 자본의 유입이 오히려 소비자의 흥미를 잃게 만들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전주한옥마을과 어우러진 전주 객리단길이나 양양 서핑거리로 불리는 양양 인구해변 양리단길은 지역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바탕으로 발전해왔습니다. 하지만 황리단길, 송리단길처럼 지자체가 주도적으로 상권 부흥에 개입할 경우 다른 지역 상권과의 차별성을 상실케 만드는 요인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죠. 서원석 중앙대학교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리단길’은 발전, 개발이 필요한 상권이 아닌 유지해야 하는 상권”이라고 조언합니다. 서원석 교수는 “가로수길에서 볼 수 있듯이 대규모 자본의 유입은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각각 특성을 유지하며 상권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생략하게 만든다”며 “‘○리단길’이 짧은 시간 내 특색 있는 상권에서 화려한 상권으로 바뀐다면 소비자들은 이전만큼 개성을 발견하지 못해 생각에 더 이상 이들 지역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경리단길의 위기를 ‘○리단길’ 자체의 위기로 해석하는 것도 조금 섣부른 듯 합니다. 뜨겁게 달아오른 냄비는 언젠가 식기 마련이니까요. 최근 경리단길은 하락세일지 몰라도 경리단길이 속해 있는 이태원 상권은 해방촌, 후암동, 회현동으로 계속 확장하는 추세입니다. ‘○리단길’이 오래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들 상권을 ‘○리단길’이라는 틀에서 발전시키려는 노력보다 그 지역의 이야기를 간직하려는 노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현주 인턴기자 apple260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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