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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죽음 택한 환자를 최선 다해 살리는 의사,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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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24)

"이 환자를 살릴 수 있을까요?"

중환자실을 처음 맡은 담당의가 물었다. 회복 가능성은 작았지만,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종종 절망을 딛고 일어나는 환자들이 있으니까. 어차피 환자의 생사는 우리 영역이 아니다. 결과는 신만이 알고 있다. 나는 의사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죽어가는 환자를 죽으라고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차라리 다른 환자를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는 이 환자에게 쏟는 정성이 아깝다고 했다.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하는 환자였으니까. 십중팔구 성과도 나쁠 것이 틀림없었다. 회의감이 드는 게 당연했다. 효율로만 따지면 그 시간에 다른 환자를 보는 게 나았다. 우리에게 맡겨진 중환자는 한둘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눈앞의 목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응급의학과 의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소모할 수는 없었다. 다른 환자가 나빠지면? 그때 가서 가래로 메꾸면 될 일이다.

중앙일보

중환자실, 응급실에는 의료진의 의지와 결정에 생사 여부가 달린 환자가 많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엔 의사가 보증을 서고 응급 수술을 하기도 한다. 사진은 지난 5월 서울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구급차 이송 직원들이 환자를 이송하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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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굳이 살릴 필요가 없는 환자라고 생각해요."

쓰러진 채 실려 온 환자였다. 보호자가 없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환자 상태를 설명할 곳이 없었다. 별수 없이 동의서엔 담당의와 나의 서명이 들어갔다. 의사 두 명의 동의로 환자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생면부지 남을 위해 보증을 선 셈이었다.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환자가 의식이 있다면, 아마 죽게 내버려 두라고 했을 거 같아요."

스스로 죽기를 택한 환자였다. 차트엔 여러 번의 자살 시도 기록이 있었다. 담당의는 죽고자 하는 환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살려내면 어차피 또 죽을 텐데.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오죽하면 죽기를 택했겠느냐며. 치료하지 않고 그냥 두는 게 정의롭지 않겠냐고 했다. 잠깐 말문이 막혔다. 생의 의지가 없는 이를 살리는 게 맞을까? 포기하는 게 맞을까? 어느 길이 정답인지는 나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를 설득할 논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설득 대신, 내가 이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자살 시도가 본심인지 잠깐의 실수인지 내가 알 길은 없다. 알 수 없으니 굳이 판단을 내리지도 않으련다. 나는 그저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살릴 수만 있으면 나는 몇 번이든 환자를 살릴 것이다. 사람들이 의사에게 바라는 건 그게 아닐까? 살아난 이후 다시 죽든 말든, 그건 본인이 선택할 일이다. 내 앞에 환자가 있다면, 그게 몇 번이든 최선을 다해 살려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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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소임은 환자의 증상을 낫게 하고 살리는 일이다. 스스로 죽기를 택했거나, 의식이 없는 환자라도 뒷일은 일단 환자를 최선을 다해 살려놓고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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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비는 어떻게 되나요?"

환자를 살리면 나중에 벌어서 갚을 테지. 만약 이대로 죽는다면? 어디 청구할 곳도 없었다. 행여 살아나더라도 병원비를 보면 다시 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식물인간이 되면, 계속 불어나는 병원비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담당의가 재차 물었다. 누군가 해결해 주지 않을까? 나는 무책임한 대답을 했다. 가난 구제는 국가와 사회의 몫이니까.

나의 소임은 환자의 치료지 병원비 마련이 아니다. 나는 내가 맡은 일만 하면 그만이다. 이런 경우에 못 받는 비용을 병원이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의사로서 신념이 흔들릴지도 모르니까.

"여전히 모르겠어요. 누구를 위한 일인지."

난 환자를 볼 때 커다란 대의를 생각하지 않는다. 흉악한 범죄자는 죽게 내버려 두는 편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거나, 한정된 자원을 이렇게 활용하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린다거나, 이런 어려운 고민은 나라와 사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한 명의 의사로서 내게 주어진 임무는 눈앞의 환자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뒤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타부타 따지지 않는다.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주저 없이 칼을 든다.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나는 소시민일 따름이니까.

"얘기를 들어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나는 의사다. 교사가 아니다. 답은 모른다. 그저 보여 줄 뿐이다.

조용수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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