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에서 줄줄이 패했지만 법정 투쟁 이어가
시민들 방청 응원…한국에서도 지지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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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조 기자가 아닙니다. 이 공격은 저에 대한 공격만은 아닙니다. 역사와 마주하고 진실을 전달하려는 저널리즘에 대한 ‘배싱’(때리기)입니다.”
2일 오후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 삿포로고등재판소에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재판장을 앞에 두고 또박또박 힘줘 말했다.
우에무라는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보도한 인물이다. 이날 법원에서는 우에무라가 자신의 보도를 “날조”라고 공격한 우익 인사 사쿠라이 요시코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2차 구두변론이 열렸다. 우에무라는 2015년 사쿠라이와 사쿠라이의 칼럼 및 기사를 실은 잡지사 2곳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사죄 광고를 게재하고 각 550만엔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지난해 11월 삿포로지방재판소는 사쿠라이의 칼럼이 우에무라의 사회적 평가를 떨어뜨린 것은 맞지만 사쿠라이의 글 자체는 해당 사안을 진실한 것으로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우에무라를 향한 공격은 2014년 본격화됐으며, 사쿠라이를 비롯한 우익 인사들이 중심에 있다. 우익들은 우에무라가 1991년 보도한 구절 하나하나를 트집 잡아 날조라고 몰아붙였다. 우에무라가 쓴 당시 기사의 첫 구절에 “여자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전장으로 연행돼”라는 부분이 나온다며,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고 썼다는 식의 공격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에는 위안부 피해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아 두 용어가 혼용됐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눈감은 것이다. 우에무라는 법정에서 “정신대라는 표현은 당시 일본과 한국 언론에서 모두 일반적으로 썼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우에무라는 우익들에 대해 “충분한 취재는 물론 자료를 끝까지 읽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내 기사를 날조라고 공격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그는 사쿠라이가 1992년 잡지에 김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3명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일본군에게 강제적으로 징용됐다는 그들의 호소는 인간으로서 같은 여성으로서 동정 없이 들을 수 없었다’고 쓴 기사를 증거로 새로 제출하며, 사쿠라이 본인의 글에도 모순이 있음을 지적했다.
우에무라는 다른 우익 인사인 니시오카 쓰토무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지난달 26일 1심에서 패소했다. 도쿄지방재판소는 삿포로 지방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니시오카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공익성,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타당한 이유’ 등을 들어 패소 판결을 내렸다.
우에무라에 대한 일본 내 공격은 여전하다. 포털 사이트 ‘야후재팬’에서 우에무라의 이름을 검색하면 “사형”이라는 단어가 연관 검색어로 뜬다. 하지만 우에무라는 법정 밖에서도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9월 일본 진보적 주간지 <주간 금요일> 사장에 취임해 진보 언론 살리기에 나섰다.
이날 재판 방청석은 78석이 꽉 찼다. 한국에서는 이부영 전 의원과 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이 지지 방문을 했다. 이 전 의원은 “한국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우에무라 같은 사람과 함께하는 노력은 부족했다”고 말했다. 임 전 부사장은 “우에무라는 우익 테러를 당하고 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정치권력과의 싸움보다도 힘든 싸움이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한국에도 ‘우에무라 다카시를 돕는 모임’이 구성돼 지지 및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삿포로/글·사진 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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