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6 (화)

[기자가만난세상] 어느 ‘상인정신’의 체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얼마 전 일본에서 온 택배를 즐거운 마음으로 열어봤다. 책을 손에 받아드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어서다. 상자를 개봉하는 중에 안을 봤더니 하얀 봉투가 책 무더기 사이에 들어 있었다. 뜯어보니 봉투 안엔 1000엔과 동전 몇백엔, 그리고 편지가 들어 있었다. 동전은 짤랑거리지 않게 테이프로 편지지에 꼭꼭 싸매어 있었다. 택배를 보낸 일본의 고서점 주인이 쓴 편지였다. 흘려서 쓴 글씨로 “늦어서 죄송하다. 그래서 1000엔을 깎아서 드리겠다. 택배비도 잘못 계산했더라. 동전은 잘못 계산한 택배비니 돌려드린다.” 내가 주문한 건 어느 일본인 학자의 전집이었는데, 전집이 특별히 늦게 온 것도 아니었고, 택배비가 잘못 계산된 걸 한국인인 내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고서점 주인 나름의, 장사치로서의 고집이 보였다.

세계일보

박현준 정치부기자


# 서울 미근동 경찰청 주변 옆 어느 오피스텔 건물엔 ‘쏘피아 서점’이라고 있다. 대형서점은 아니지만 사회과학이나 독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겐 성지(聖地) 같은 곳이다. 내가 알기론, 아마 서울에선 유일하게 독일어 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다. 백발의 주인 할아버지는 일본의 대학에서 독문학을 배웠지만 학자나 교수가 되기보단 굳이 서점을 차렸다고 들었다. 50년쯤 됐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긴 시간이다. 손님이 들어서면 주인 할아버지는 늘 차 한 잔을 건네며 “앉아서 천천히 보라”고 했다. 책값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딱 받을 만큼만 받았다. 그래서 자주 들렀다. 직장일에 바빠 오랜만에 들렀더니 다른 분이 서점을 지키고 계셨다. 백발의 주인 할아버지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은행에 다니는 친구가 경제가 큰일이라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돈이 안 돈다고 했다. 조선 말기의 ‘전황(錢荒)’ 같단다.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하거나 생활비에 쓰는 사람이 많은데 담보대출 자체가 원천 봉쇄되다 보니 돈이 안 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이 엉뚱한 데로 흘러들어 가는 일이 더 심각하다는 게 이 친구의 얘기다. 최근 들어 ‘열정만 있는’ 젊은이들이 국책 보증기관의 보증서를 들고 은행에 “대출받겠다”며 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정부에서 청년창업을 독려하는 정책을 펴다 보니, 국책 보증기관에서 신용보증서를 남발하고 은행은 어쩔 수 없이 대출을 해주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친구는 이런 ‘얼치기 사장들’이 언제 망할지 몰라 너무 무섭다고 한다.

돈이 제대로 된 ‘상인 정신’을 갖춘 사람한테 가지 못하는 건 불행이다. 그런 돈은 비싼 술과 스포츠카로 불살라 버려질 운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에게 사업하라고 돈을 주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제대로 된 ‘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인지 선별하는 작업도 필수적이다. 그 돈이 나랏돈이고, 결국 국민 세금이라면 더욱 그렇다. 반짝 오른 취업 통계는 정치인과 공무원의 생명을 잠시 연장해도, 결국 거덜 난 나라살림을 떠맡아야 하는 건 우리 국민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샜지만 일본의 고서점 주인에게는 나도 편지를 써서 보냈다. “대학 다니던 시절부터 좋아하던 학자의 책인데 한국에선 구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 구하고 보니 정말 기뻤다. 보내주신 책을 잘 읽겠다.”

박현준 정치부기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