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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사설] 한·미 정상 통화 유출 파문, 외교 난맥상 드러낸 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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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외교관, 사적으로 기밀 유출 / 외교협의·정보공유에 타격 줄 것 / 책임 묻고 외교 전반 쇄신 나서야

세계일보

주미대사관 소속 고위급 외교관이 3급 국가기밀인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야당 의원에게 유출한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이 외교관은 지난 7일 한·미 정상 간 통화가 이뤄진 다음날 대사관에서 통화 내용을 열람한 뒤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이를 전달했다고 한다. 극비사항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방한 일정 논의도 유출됐다.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다. 다음달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 간 신뢰 관계를 흔들 수 있는 대형 악재가 터진 것이다.

외교부 합동 감찰 결과, 이 외교관은 정상 간 통화 외에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면담 타진 등 2건의 외교기밀을 더 누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관이 사적인 목적으로 비정상적 경로를 통해 국가기밀을 유출한 것은 외교상 기밀누설죄에 해당하는 범법 행위다. 더구나 외교통신시스템을 통해 암호문서로 조윤제 주미대사만 보도록 전달된 정상 통화 내용을 대사관 직원 여러 명이 문서로 출력해 공유했다고 한다. 외교 최전선 첨병 역할을 하는 주미대사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조직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외교부의 기강 해이와 총체적인 난맥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 외교의 대외 신뢰 상실이다. 외교 협의, 특히 정상 간 대화 내용은 합의하거나 양해한 내용만 외부에 공개한다. 이런 최소한의 신뢰가 있어야 민감한 현안을 놓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그런 외교의 기본을 무너뜨린 것이다. 앞으로 어느 나라가 한국을 믿고 외교 협의나 정보 공유를 하겠는가. 한반도 정세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한 외교관의 기밀 유출 행위가 한·미 간 신뢰를 손상해 긴밀한 소통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강 의원이 외교기밀을 무책임하게 공개한 행위도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 숨기기에 급급한 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지만, 국익을 훼손한 것이 분명하다. 한국당이 ‘공익 제보’, ‘국민의 알 권리’라는 말로 물타기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죽하면 한국당 소속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마저 “당파적 이익 때문에 국익을 해치는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비판했을까. 외교 문제는 진영 논리나 당리당략이 아닌 국익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동안 외교부가 도마에 오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대통령 방문국 국명 오기(誤記), 회담장의 구겨진 태극기, 몇몇 대사의 폭언·갑질 등 온갖 사고가 잇따랐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에 비할 바 아닌 중대한 외교 참사다. 조세영 신임 외교부 1차관은 어제 “신속하고 엄중한 문책조치와 재발방지 노력을 통해 하루빨리 외교부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외교부 자체 징계에 그칠 게 아니라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외교 전반의 쇄신에 나서야 할 때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조직관리에 문제가 없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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