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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노무현을 다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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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편집장의 편지

한겨레21

여러 이유로 노무현은 저에게 어려운 이름입니다.

언제 어떻게 손에 쥐게 됐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보, 나 좀 도와줘>란 책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습니다. 흔히 일컫듯 상고 출신 사법시험 합격이란 성공 신화와 함께 의지 강한 노무현이 머릿속에 각인되었습니다. 드라마틱한 선거를 거쳐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저는 법조 출입기자였습니다. 혁명적이었던 희망돼지 저금통이 고발돼 들어왔고, 얼마 있다 ‘검사와의 대화’를 지켜봤습니다. 알고 있던 검사 하나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자들도 잘 안 만나는 평검사를 대통령이 만나는 모습에 탈권위적이란 인상이 깊게 새겨졌습니다. 당시 저 같은 막내 기자들도 보통 부부장이나 부장 검사를 만나 취재하던 때였습니다.

여의도로 출입처를 옮기자 한나라당이 이름 붙인 ‘4대 악법’으로 정치판이 시끄러웠습니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과거사 기본법,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 개정안을 추진할 때였습니다. 그때 뒤틀린 역사와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강단을 속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러다 이라크 파병,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실망이 자랐습니다. 평화에 반한 탓인지, 아니면 미국 주도의 국제정치에 종속된 한계를 드러냈다고 생각한 탓인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는 결정적이었습니다. 현실성 없어 보이는 대연정 제안 때는 이미 마음이 식어 있었습니다. 저는 ‘바보 노무현’에 어느새 비판적인 시민이 되었습니다. <한겨레21> 기사도, 더 크게는 논조도 그의 정책과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던 그날, 오랜 벗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울면서 말을 잇던 그는 울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덩달아 그치지 못하는 아빠의 울음에 어리둥절한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며칠 뒤 광화문 분향소를 찾았습니다. 어느덧 10년이 흘렀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의 무게가 너무 커 글과 말로 함부로 꺼내지 못했습니다. 가끔 그에게 날린 비판을 다시 되짚어봤습니다.

11년 전 노 전 대통령이 퇴임식 뒤 ‘시민 노무현’의 길을 가겠다면서 봉하마을로 내려간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때 쓴 <한겨레21> 기사를 읽어봤습니다. ‘시민주권시대를 위하여-노무현의 민주주의론’이란 글이 소개돼 있었습니다. 기사는 A4용지 다섯 장짜리 글을 한 문장으로 거칠게 압축했습니다. ‘시민이 주체가 돼 시장의 지배를 제어하면서 진보적 시민민주주의를 완성해나가야 한다.’ 원문을 찾아 읽어보니, 저의 오해가 또 하나 풀렸습니다.

2005년 5월16일이었습니다.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냉정한 현실 진단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실망했습니다. 적지 않은 진보 지식인들이 마치 그가 시장에 자리를 양보해준 것처럼 의미를 부여했는데, 저 또한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날 이건희·정몽구·최태원 등 재벌 총수들이 마주 앉아 있었던 자리의 성격도 의심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시민주권시대를 위하여’를 다시 보니, 질적 민주주의를 이뤄가는 관점에서 그의 시장에 대한 인식은 오해의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은 절반의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올 만큼 다 온 것이 아닙니다. 시장의 지배를 얼마나 제어해나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차례 말했습니다. 시장의 패자와 낙오자가 지배받지 않고 예속되지 않도록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재벌 과점 체제와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은 채 더 심화하는 지금 노무현 정신은 유효하고 앞으로도 유효합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는 쉽게 역행할 수 있다는 것도 지켜봤습니다. 민주주의가 올 만큼 다 올 때까지 노무현은 우리에게 미래입니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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