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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정동칼럼]잔인한 봄, 슬픔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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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 거친 막말이 내던져지고 죽은 이들마저 정쟁으로 소비되는 소란 속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이했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새삼 그를 떠올린다. 특히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둘러싼 정부와 검찰의 마찰은 검찰개혁이라는 오랜 난제와 맞물려있다. 그것은 노 전 대통령의 공약이자 미완의 숙원이었다. 취임 직후 그와 ‘검사들과의 대화’는 젊은 대통령 노무현의 시련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내 기억 속에 남았다.

경향신문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문무일 검찰총장은 현재 제시된 검경 수사권 조정안에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도 검찰이 자성·각성하고 자체적 개혁안을 추진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검찰권력의 축소와 조직 개혁의 필요성은 널리 인정되지만, 얼마나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관한 의견차가 첨예한 상황이다.

이 와중에 ‘장자연리스트 사건’을 조사해온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수사를 권고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조사를 마무리했다. 성폭력과 ‘리스트’의 진상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은 애당초 검경의 수사 부실 및 증거, 자료, 기록의 무더기 누락, 증발 때문이다. 조선일보 외압 의혹과 관련 수사의 미진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핵심 의혹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여 수사를 권고할 수 없다는 위원회의 보고는, 검찰이 주도하는 형사사법체계의 실효성을 의심하게 한다. 증거가 부실하게 수집되고 수사기록이 어이없이 증발한 이유가 밝혀지지도 않고 누가 그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을 따름이다.

게다가 조사단 구성에서 소수인 내부단원 검사들의 의견을 위원회가 채택해 외부인 단원들의 다수 의견이 묵살되었다는 공개 비판을 진상조사단 총괄팀장인 김영희 변호사가 내놓은 터다. 힘없는 한 사람이 목숨을 잃은 배후로 의심되는 거대 언론사의 외압과 용두사미 셀프 조사, 조직이기주의의 의혹이 남는다면, 아무리 국민의 실생활과 기본권을 내세우더라도 검찰의 자체 개혁을 신뢰하고 지지하기가 쉽지 않다.

검찰개혁은 2003년 노 대통령 취임 당시 뜨거운 현안이었다. 검찰개혁을 최초로 시도했던 노 대통령의 개혁의지와 파격적 인사에 검찰 조직은 반발했고, 취임 한 달도 되기 전에 검사들과 마주 앉은 노 대통령에게 그들은 모욕에 가까운 공격적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결국 그는 검찰개혁에 실패했고 그 실패를 통탄했다.

2007년 이른바 ‘삼성X파일’ 사건은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또다시 표면화했다. 고 노회찬 의원은 “수사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검찰”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떡값 검사’ 7명의 명단과 X파일 녹취록 일부를 공개한 보도자료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그로 인해 기소된 노 의원은 2007년 5월22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검찰의 기소를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꼭 2년 뒤인 2009년 5월23일에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 중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노회찬 의원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국회의원 지위를 상실했다. 이 불운한 연쇄작용은 작년 7월 그의 자결로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또 임기 후 검찰 수사 과정에서 그의 변호인으로서 그를 지켜봤던 문재인 변호사는 이제 대통령이 되어 검찰개혁을 다시 시도하고 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사법정의를 담보로 잡히고 추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5월은 불안하다.

5월은 잔인한 달이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시인 T S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의 살육을 목도한 후, “죽었던 땅에서 라일락꽃을” 움틔우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는 4월의 생명력이 불모(不毛)의 문명과 대조를 이루는 모습에서 절망을 느꼈던 모양이다. 우리에게 4월은 수백의 생명을 한꺼번에 잃었던 슬픔이 지난 시절 혁명의 기억과 교차하는 시간이다. 그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가족을, 삶을, 미래를 송축하라는 명령과 함께 들이닥치는 5월은 눈부신 햇살 속에서 어김없이 1980년 광주의 영혼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이제 꼭 10년이 된 그 상실이 있다.

가장 잔인한 달을 꼽은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노란 리본들이 나부끼는 팽목항 바닷가에서, 볕이 따스한 광주의 묘역에서, 노란 깃발들이 파도치는 시청 앞 광장 노제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고 영원히 그들의 빈자리를 더듬는 봄은 잔인하다. 노란 국화꽃에 둘러싸인 사진 속 만개하지 못한 미소로 남은 그의 혼을 달래지 못하는 우리의 봄은 잔인하다. 그 많은 이들을 잃은 뒤 세상이 과연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하기에.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은, 죽은 이들의 빈자리가 그저 폐허로만 남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되는 두려운 일이기에.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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