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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정광필의 인생 낚시터] 세미원에서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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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난 토요일,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태백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세미원으로. 입구에 도착하니, 양평군에서 만든 무료 공영주차장이 여럿이다. 길 건너편에는 양서친환경도서관도 있다. 생태를 표방하는 양평군의 노력이 엿보인다.

입구의 불이문은 사찰에 들어서는 세 번째 문 이름을 빌렸는데, 사람과 자연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우리 민족의 태극기 속에 내재된 자연 철학사상을 담았다고 한다. 둘이 어떻게 어울릴지 궁금했다. 불이문을 들어서니, 바로 징검다리가 나타나고 주변이 온통 푸르른 숲이다. 게다가 졸졸 흐르는 물 위에 징검다리로 이어진 길이 숲속으로 아득히 사라진다. 문의 안과 밖을 다른 세상으로 연출하는 정말 멋진 수법이다.

그 물길의 안쪽은 연꽃 정원이다. 그런데 정원이 한반도 모양이고, 이름도 나라를 생각하는 정원이란 뜻을 지닌 국사원(國思園)이다. 그리고 주변에 남이 장군과 강감찬 장군의 석상까지 배치했다. 아니, 이건 뭐지? 여기가 남한산성도 아니고 나라를 지킨 분들이 굳이 물과 꽃의 정원에 나서야 할까? 활짝 핀 백수련이 겸연쩍다.

이어서 장독대 분수가 소나무와 멋지게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그런데 웬 비석?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연보호 휘호다. 옆 연못가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삼천리강산을 금상첨화하자'고 훈시하는 글을 벽보처럼 붙여 놓았다. 이어지는 연못으로 나서는데 느닷없이 송아지만 한 고라니가 옆으로 치고 나간다. 놀랐지만 반갑다.

한편 연못마다 말, 홍학, 백조, 기린, 도자기 분수 등 여러 조각과 설치미술이 배치돼 있는데 정작 이곳에 사는 고라니는 없다.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했다지만 상당히 혼란스럽다. 급기야는 세한정까지 나타났다. 추사 김정희 선생과 제자 이상적의 아름다운 사연을 담았다는데, 조금 엉뚱했다. 이쯤 되니, 또 무엇이 나타날지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이 된다. 이윽고 수련을 사랑한 화가 '모네의 정원'이 나타났다. 파리 근교에 있는 '모네의 정원'을 모방하느라 아치형 다리까지 만들었다. 그나마 이제는 '모네의 정원'이란 이름을 괄호에 넣고 '사랑의 연못'이라며 포토존을 만들었다.

'물과 꽃의 정원'인 세미원(洗美園). 뜻을 풀이하자면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자는 곳인데, 이건 뭐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는 듯하더니, 위기에 처한 나라를 생각하자며 장군들을 내세우고, 추사 선생과 이상적의 우정을 기리는 세한정이 등장한다. 심지어는 '모네의 정원'까지.

하도 어이없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처음에는 환경운동단체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연꽃을 심다가 15년 전 경기도의 지원으로 연꽃단지를 조성했다. 이후 하나씩 정원을 덧붙였는데, 프로젝트 사업과 지방자치단체장에 따라 방향이 흔들린 탓이리라.

그래도 천혜의 자연환경과 교통 편의를 갖췄으면 새로운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공간은 하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잘 연결돼야 의미 있게 경험된다. 지역적 특색과 철학이 담긴 이야기가 공간 속에 잘 녹아 있을 때 그 공간을 찾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문화적 감수성을 높여준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난다는 지리적 특성, 연꽃의 환경 정화 기능과 상징적 의미를 잘 살리는 서사가 나온다면 세미원은 방문객들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명소가 되지 않을까?

요즘 한류문화가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몇몇 뛰어난 영재들의 기량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획사의 기획력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그에 따른 성공은 일시적일 수 있다. 일상의 경험을 통해 평범한 시민들의 문화적 안목과 감수성이 고양될 때, 그리고 교육을 통해 철학과 서사 능력을 갖춘 인재들이 배출될 때 한류의 바람이 지속되는 것 아닐까?

[정광필 50+인생학교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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