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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기자칼럼]어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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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은어 중 ‘어그로’라는 말이 있다. 대개 ‘어그로를 끈다’는 관용구로 사용된다. 영어 단어 aggravation에서 왔다는 게 정설이다. 도발, 약올리기의 뜻을 가졌다.

경향신문

어그로를 끈다는 것은 부정적인 이슈를 내세워 관심을 모은다는 뜻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유행하고 있는 ‘막말’은 ‘어그로를 끄는 관종’의 짓이다. 현실 정치의 어그로는 실보다 득이 많다. 어그로의 수위만큼 자신의 지명도가 높아진다. 점점 더 자극적인 어그로가 유혹하는 어그로의 악순환이다.

정치 관종의 어그로는 잃을 게 별로 없다. 막말과 망언은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정치판을 지저분하게 오염시킨다.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동시에 일부 지지자들을 결집시킨다.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지긋지긋한 정치로부터 떠나게 만들고, 지지자를 결집시키니 완벽한 플러스다. 정치판이 오염될수록 새로운 ‘유망주’가 유입될 가능성도 낮다. 새 얼굴이 없으니 자신의 자리는 더욱 탄탄해진다.

지나치다 싶으면 사과를 하면 된다. 요즘 말로 ‘영혼 없는’ 사과는 다시 한번 어그로를 끄는 데 효과적이기까지 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에 대한 혐오표현을 공개적으로 한 뒤 “정확한 의미와 구체적 유래를 전혀 모르고 썼다”고 해명했다.

‘어그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단어지만 출발은 달랐다. 원래 ‘어그로’는 ‘팀을 위한 희생’을 뜻하는, 말하자면 ‘숭고미’를 가진 단어였다.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MMORPG)에서 이 말이 나왔다. 여러 명의 플레이어가 참가하는 온라인 역할 게임이다. ‘파티’를 구성해 괴물(몬스터)을 사냥하는 것이 게임의 주된 목적 중 하나다.

게이머의 역할은 크게 탱커, 딜러, 힐러의 3가지로 나뉜다. 딜러는 원거리 공격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몬스터를 공격해 에너지를 떨어뜨린다. 인터넷 은어 중 ‘상대를 극도로 괴롭힌다’는 뜻의 ‘극딜’이 여기서 나왔다. ‘딜링’은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다.

힐러는 힐링(healing)을 맡는다. 전투 도중 피해를 입은 팀원들을 치료해 회복시켜주는 역할이다. 마지막 하나, 탱커가 바로 ‘어그로’의 주인공이다. 탱커는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낸다. 탱커가 두들겨 맞으면서 버티는 동안 딜러가 몬스터를 공격하고, 힐러가 탱커 또는 딜러를 치료하면서 팀 전력을 높인다. 3가지 캐릭터의 호흡이 맞아야 몬스터를 때려잡을 수 있다.

몬스터의 공격이 딜러나 힐러를 향하면 파티 전력에 큰 손실을 입는다. 탱커는 몬스터가 계속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때 사용하는 전술이 바로 ‘어그로’다. 탱커는 몬스터를 향해 도발을 계속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든다. ‘어그로를 끄는’ 것은 대중들에게(혹은 지지자들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팀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희생적 행동이다. ‘내 친구들 말고 나를 때려라’라고 외치는 행동이다. 내가 두들겨 맞는 동안 내 동료들이 승리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종합격투기 선수 권아솔은 ‘어그로’ 전문이었다. 로드FC 소속으로 거침없이 막말을 이어갔다. 때로는 ‘트래시 토크’ 수준을 넘기도 했다. 지난 18일 제주에서 열린 굽네몰 로드FC 053 메인이벤트에서 만수르 바르나위에게 1라운드 초반 리어네이키드초크를 당해 졌다. 팬들의 비난이 거셌다. 권아솔은 SNS에 이렇게 적었다.

“선수가 시합을 못했다면 욕을 먹어야 한다. 그렇지만 선은 지켜달라. 나라의 지원도 못 받는 한국 종합격투기가 살아남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해서 한 거다. 이런 게 아니면 사람들이 봐주지 않는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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