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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조진만의 도발하는 건축]여백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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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도서관을 매개로 마을과 비단산 사이에 다양한 여백이 삽입된 ‘내를 건너서 숲으로’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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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로서 건축주에게 의뢰받은 새로운 계획을 제안할 때마다 항상 논점이 되는 것은 특정한 기능을 가지지 않는 중정이나 넓은 복도와 같은 공용공간의 쓰임에 관해서이다. 왜 이러한 쓸모없는 공간을 크게 만드는 것이냐고 물으면 이것은 전체적인 건축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여백”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여기서 말하는 여백이라는 것의 의미는 아무 목적도 없는 ‘0’의 공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개입과 아이디어에 의해 무한적으로 가능성이 확장되는 시작으로서 ‘0’의 공간이다.

경향신문

기능적으로만 정돈되고 짜인 공간은 일견 효율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계획된 것 이상의 어떠한 가능성도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 삶을 조직하고 창조적 관계성을 만들어야 할 공간이 획일적이며 일방적 소통의 틀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쓰임이 불분명한 일견 낭비와도 같아 보이는 여백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은 발휘된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언어나 전통적 공간과 여기서 생성되는 인간관계는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 덕분에 풍요로움을 가질 수 있었다. 서예와 한국화는 여백의 미였고, 우리의 대청, 툇마루같이 풍부했던 기능이 명확하지 않은 영역들은 사람들과 자연 앞에 활짝 열려 항시 쓰임에 있어 풍요했다.

건축과 마찬가지로 도시 차원에서도 여백이 필요하다. 최근 우리 도시에도 다양한 재생과 입체적 활용을 통해 성숙한 도시문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복잡 다양한 사람들의 욕구와 행위로 다채로워지는 가능성의 공간이 도시의 여백이다. 그것은 단순히 빌딩들 사이에 남은 곳을 정돈한 공개공지나 필요 이상으로 크고 비워진 업무시설의 로비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갖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장소성과 지역 특색을 살린 여백을 만드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도시의 여백을 얼마나 개성적이고 풍요롭게 마련해 공동체의 기억을 새겨나갈 것인가가 앞으로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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