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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직설]치안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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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이라도 인사불성 상태의 취객을 상대해본 사람이라면, 과도한 알코올이 인간을 얼마나 강하고 대책 없는 존재로 만드는지 알 것이다.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취객을 손쉽게 제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최근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논평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오히려 그 영상을 반복적으로 재생하고, 대응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동료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하면서 ‘그럼에도 논란’이라는 식의 보도를 지속하는 언론들이 논평의 대상일 수는 있을 것이다. 여경 폐지라는 억지주장을 하는 이들의 주장을 계속해서 사회적 여론인 것처럼 다루며 의미 없는 수선을 피워대고 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그간 너무 많은 영화와 매체들이 경찰의 업무를 극적이고 폭력적으로 연출해왔다. 하지만 경찰의 일상이 도심을 가르는 추격전과, 목숨을 건 혈투로 점철되어 있지는 않다. 표창원 의원에 의하면 세계 각국의 경찰 업무 중 물리력을 사용하는 업무의 비중은 많게 잡아야 30%가량이고 나머지 70%는 대민 업무를 비롯한 소통 업무다. 만약 경찰이 빈번하게 물리력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치안이 극도로 불안정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경찰일수록 인권감수성, 합법성, 소통능력이 더욱 중시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공권력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 적법한 절차에 따라 물리력을 행사할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만약 경찰의 폭력이 두려워서 그들의 말을 듣기로 한 것이라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찰이 상대하는 이들이 언제나 험상궂은 덩치들뿐인 것도 아니다. 경찰은 조폭도 상대하지만, 지능범이나 교통사고를 낸 사람도 상대하고, 그게 범죄라는 것도 모른 채 대수롭지 않게 범법을 행한 사람도 상대한다. 서로 언쟁을 벌이는 사람들도 상대하고, 각종 시위대도 상대하며, 범죄의 피해자들도 상대한다. 그러므로 푸시업을 더 잘하는 사람에게 경찰 업무를 모조리 맡겨야 한다는 발상은 단순함을 떠나 지극히 위험하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여성 경찰은 무용하다는 주장을 일축했다. 그리고 이 논의들은 여성 경찰의 현실적 필요와 역할을 재차 확인해주었다. 여성 경찰들은 통상적인 경찰 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흉악범죄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이므로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나 조사 과정에서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고, 일상적인 업무에서 불필요한 물리력 행사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런 실용성에 앞서 선행되어야 하는 논의는 치안이라는 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민주주의적으로 구성하고 통제할 것이냐는 물음이다. 가령 지난 정권에서 경찰은 민간인 및 반(비)정부 세력에 대한 감시를 벌이고 여론조작을 하는 등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했다. 집권세력을 위한 불법적인 정보수집, 선거 개입, 진보적 인사·단체들에 대한 견제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적 통치하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상처럼 벌어져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경찰의 가장 큰 문제는 취객을 한손으로 제압하지 못하는 여성 경찰이 아니라, 그릇된 조직 보위 논리와 권력욕에 빠져 공권력의 정당성 자체를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있는 조직의 전·현직 결정권자들이다. 경찰청의 중요한 사안을 무술대회를 열어 결정한다고 해도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절호의 기회를 만난 듯이 여경 폐지를 외치는 남자 경찰공무원 지망생들도 마찬가지다.

경찰의 무장과 폭력 사용이 공권력에 대한 존중을 높여주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공권력이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복이지 몽둥이가 아니다. 제복 속에 사람의 성별과 피부색과 성 정체성과 장애 여부는 더더욱 아니다. 경찰과 경찰 지망생들께서는 업무에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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