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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공감세상] ‘강성귀족노조’ 알리바이 / 서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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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5월17~18일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대산석유화학단지 내 한화토탈 공장에서 기름증기가 유출되었다. 이 사고로 공장 노동자와 인근 주민 700여명이 병원 치료를 받고 있으며, 21일 정부는 합동조사반을 꾸렸다고 한다. 같은 날 김학용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은 이 사고가 “강성노조의 파업이 국가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여실히 드러낸 사고”라는 입장문을 내놓았다. 원인 조사도 끝나지 않았는데 그는 어떻게 ‘강성노조 때문에 발생한 사고’라는 걸 미리 알았을까?

김학용 의원에 따르면, ‘한화토탈 노조원의 평균 연봉이 1억2천만원에 달한다고 하는데, 한달 가까이 파업을 하고 있어 회사가 일부 공정에 비조합원을 투입하다 발생한 사고’이기 때문에 ‘강성노조가 사고의 한 원인’이란다. 김학용 의원의 주장은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가 이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고 재발을 방지해야 할 책임이 있는 소관 위원회의 위원장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

이 공장에서는 지난 2월에도 노동자 9명이 화염에 노출되는 위험한 사고가 있었다. 그때도 한화토탈은 이번처럼 사고를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대산석유화학단지에는 한화토탈을 비롯해 현대오일뱅크, 엘지(LG)화학, 롯데케미칼 등 60여개 기업의 공장이 있다. 2018년 1월에는 롯데케미칼 공장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이 누출되었고, 5월에는 엘지화학 공장에서 폭발이 있었으며, 8월에는 현대오일뱅크 공장에서 유증기가 유출되는 사고가 있었다. 대규모 단지 내에 입주한 공장들에서 돌아가면서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김학용 의원은 현장 노동자들과 인근 주민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 모든 안전사고가 ‘강성노조’ 탓이라고 할 텐가? 정부와 국회가 작업장 안전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감독을 하지 않고, 사고 발생 시 기업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은 채 이런저런 면죄부를 줘온 관행 때문에 현장 노동자와 주민들이 위험에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책임을 통감해야 할 소관 위원회 위원장이 제 할 일을 하지 않아 국민을 위험에 빠뜨린 반성은 하지 않고, 노조 탓으로 또 기업에 면죄부를 주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인과 일부 언론이 온갖 기업의 범죄와 책임을 면해주는 알리바이 중에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것이 ‘강성노조, 귀족노조 탓’이다. 김 의원에게 묻고 싶다. ‘연봉 1억2천만원’인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면 안 되는 것인가? 대체 얼마나 적게 받아야 파업권을 보장받을 수 있나? 이처럼 안전사고가 빈발하는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이라도 나서서 자신들의 안전을 추구하라는 것이, 헌법을 수호할 의무가 있는 국회의원의 태도 아닌가? 노동자의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헌법 제33조가 연봉에 따라 제한되어야 한다는 건, 그 자체로 위헌적 발상 아닌가?

하긴 노동권에 관한 한 우리나라 정치권과 일부 언론의 헌법 불감증이 어제오늘 일이 아닌지라, 김 의원은 자신이 특별히 위헌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다.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월급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의 노조는 ‘귀족노조’고, 헌법이 보장하는 단체행동권을 행사하면 ‘강성노조’라고 딱지를 붙이는 정치인과 언론인이 널려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노동권을 부정하는 이런 위헌적 발상이 대개 기업의 법적, 사회적 책임을 면제해주려는 사람들의 알리바이로 사용되고, 그 피해는 때로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는 점이다. 작업장 안전을 보장할 수 있도록 법을 제대로 만들어야 할 국회, 법대로 감독해야 할 정부가 기업 편에 서서 할 일을 하지 않고,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기업을 위한 알리바이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동안 매년 1천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산업재해로 죽어간다. 적어도 산업재해에 대해서만큼은 ‘강성귀족노조’ 타령을 멈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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