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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특파원칼럼]잠자는 거인 깨운 中 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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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뉴욕=김봉수 특파원] '잠자는 거인'.


지난 몇 개월간 미국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렇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겪었다지만 미국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세계 금융 중심지인 뉴욕의 사회간접시설은 낡았고 구식이다. 1904년 개통된 지하철은 쥐가 돌아다닐 정도로 냄새 나고 지저분하고 녹슬었다. 차량 내 에어컨은 가동되지만 역사 안은 찜통이다. 여름이면 온갖 인종이 뿜어내는 체향이 가득해 악취 나는 '사우나' 같다고 한다. 한국에서 일상화된 지 오래인 태그식 교통카드도 없다. 이곳에선 여전히 마그네틱 승차권을 써야 한다. 뉴욕시는 최근에야 태그식 교통카드 시범 계획을 발표했다.


주차 때문에 동전을 늘 준비해야 하는 점도 '시대에 뒤떨어진' 일면이다. 가로 주차대에서 결제할 때 신용카드도 쓸 수 있긴 하지만 개인정보 유출 등의 우려 때문에 현지인들도 대부분 동전만 쓴다. 한 달에 몇 번씩 은행에 가서 동전을 바꿔야 수요를 충당할 수 있다. 버스를 타도 마그네틱 카드와 동전만 사용할 수 있다. 그나마 마그네틱 카드 충전은 지하철역에서만 가능하다.


도로는 보수한 지 오래돼 파이고 깨진 데가 부지기수다. 뉴저지와 맨해튼 북부를 연결하는 일명 '조 다리(조지 워싱턴 브리지ㆍ1931년 완공)'를 건너보면 뉴욕의 교통 인프라가 얼마나 낡았는지 실감이 난다. 전봇대는 수십 년 된 듯한 낡은 나무이고, 도심을 제외하면 지하화 작업도 거의 안 돼 있다. 소화전도 대부분 낡고 녹슬어 미관을 해친다. IT 혁명을 주도한 아이폰의 고향이면서도 인터넷ㆍ모바일 서비스는 수시로 불통이고 고장도 잦아 골치를 썩인다. 미 대륙에는 여전히 육상 운송 수단의 혁명으로 불리는 고속철도조차 아직 없다.


2차 세계대전ㆍ냉전 승리 후 모든 면에서 최선두를 달려오고 있는 미국이지만 이처럼 몇몇 분야의 시계는 확실히 1980~1990년대에 멈춰 있다. 경제적으로도 '미제(美製)'가 최고였던 시대는 오래전 끝나지 않았나. 금융ㆍ컴퓨터ㆍ경영 기법 등 소프트웨어 분야와 군사ㆍ항공우주 분야 등을 제외한 하드웨어 분야에선 자동차 등 첨단 제품부터 단순 조립품까지 유럽, 일본, 중국, 한국 등에 따라잡힌 지 꽤 됐다. 높은 인건비 등 비싼 비용을 감당하면서 미국 내에 공장을 세워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됐던 미국 기업들은 '다국적 기업'이 돼 전 세계 곳곳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거인이 잠을 자던 사이, 자리를 빼앗겠다고 나선 게 중국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은 최근 몇 년 새 아편전쟁 이후 빼앗겼던 '제국(帝國)'의 자리를 되찾으려 했다. 일대일로(一帶一路ㆍ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유럽ㆍ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심 국가로 도약하는 것은 물론 위안화를 기축통화화해 달러화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다.


결국 중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잠자던 거인의 코털을 건드리고 말았다. 최근 미ㆍ중 무역 전쟁을 촉발한 근본 원인이다.


그런데 깨어난 거인은 예전과 달리 '셰일 오일'라는 신무기까지 장착한 터다. 셰일 오일 붐은 최근 미국 경기 활성화의 실질적 요인으로 꼽힌다. 게다가 중동에서의 해상 수송로가 끊길까 노심초사할 필요 없이 유류 자급이 가능해진 거인은 거칠 게 없어졌다. 1980년 해상 수송로 안전 보장을 국가 안보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꼽았던 카터 독트린 이후 세계의 경찰국가 노릇을 하며 '오지랖'을 넓혔던 미국은 이제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동에서 친이스라엘 정책을 노골화하고, 전 세계를 상대로 전방위 무역 전쟁을 벌이는 배경이다.


미국은 이제 더 노골적으로 자국 이기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모양새다. 2016년 말 미국 대선 당시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와 클린턴 힐러리 민주당 후보는 무역이 미국에 이로운지 아닌지를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어떻게 무역적자를 줄이는 것이 좋을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고 한다.


걱정되는 것은 오만 가지 일을 다 정리해주던 미국이 손을 놔버리는 세계 질서 속에서 펼쳐질 한국의 미래다. 가뜩이나 북한이라는 최대 위험 변수까지 떠안고 있는 상황이다.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철저히 준비하는 백년지대계를 고민해야 할 때다.



뉴욕=김봉수 특파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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