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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조홍식의세계속으로] 국경을 넘는 유럽의 민주정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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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공동체 의식 형성 추구해와 / 영국 EU 탈퇴 결정에도 의사 존중

세계일보

민주주의의 본 고장 유럽에서는 한 나라의 단위를 넘어 수십 개 국가가 함께 참여하는 대륙 차원의 민주정치 실험이 40년 전부터 진행 중이다. 유럽연합(EU)은 1979년부터 5년마다 모든 회원국의 시민이 동시에 유럽의회 의원을 직접 선출해 왔다. 이번 주 23일부터 26일까지 28개국의 유럽인들은 751명의 대표를 뽑아 초국적 민주정치의 9번째 실험을 시작할 예정이다.

민주주의란 역사적으로 이미 형성된 민족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고유한 특권처럼 여겨졌다.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 등 민족 정체성이 뚜렷한 나라에서 일찍이 민주 정치가 출범했다는 역사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다민족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사실 독립 초기 미국이란 북미 대륙 동부에 사는 영국계 주민의 공동체였다.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이 바탕이 돼야 서로 토론하고 경쟁하는 민주 정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데모스’ 즉 주인 역할을 할 공동체가 없는 데모크라시는 어불성설이라는 뜻이다.

민주적인 유럽을 만들려는 꿈을 꾸는 자들은 민주주의를 통해 유럽인의 공동의식을 형성하고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EU의 틀과 선거의 판을 만들어 장기간 반복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데모스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과거 가문이나 지역에 대한 소속감이 강하던 사람들이 긴 역사를 거쳐 서서히 민족이라는 보다 커다란 공동체로 충성의 범위를 넓혀 갔듯이, 프랑스인과 독일인도 점차 유럽인이라는 새 의식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2016년 유럽을 탈퇴하겠다는 영국 국민의 브렉시트 결정은 이런 유럽 낙관론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다. 40년 넘게 한 연합에 속해 정책을 공유하고 반복적인 선거를 치르며 공동의 삶을 영유해 왔지만 이젠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일방적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유기체와 같은 데모스가 형성되기는커녕 황혼이혼처럼 앙금만 남아 오히려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린 셈이다.

하지만 유럽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불과 수십년 만에 공동체 의식이 만들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민족 공동체의 역사는 100년의 단위가 누적돼 만들어졌다. 게다가 민족 공동체는 언어와 문자, 종교와 이데올로기, 법과 질서를 강제하면서 형성됐다. 각자의 자유와 기존 공동체의 개성을 존중하려는 현대 EU와는 달랐다. 이런 점에서 유럽의 실험은 민주적 방법으로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를 가늠해 보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은 영국에 강제로 남아있으라고 하지도 않고, 나간다고 토라져서 심통을 부리지도 않는다. 당장 이별이 여의치 않다면 시간을 두고 잘 생각해 보라며 이번 유럽의회 선거도 치르게 한다. 영국이 탈퇴하면 유럽은 원래 705명의 의원을 선출할 예정이었으나 브렉시트가 실패하자 영국을 포함하여 일단 751명을 뽑을 것이다. 혹시라도 여름에 영국이 탈퇴에 성공한다면 선출된 영국의 의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겠지만, 영국이 여전히 탈퇴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황이라면 영국 의원들은 유럽에서 나름 목소리를 낼 것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개방적이고 온건한 태도로 대하는 유럽 통합의 전통을 영국을 다루는 방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길을 항상 열어놓으면서 말이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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