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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금)

‘잘 살아남으려고’ 오늘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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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기 고양시의 한 학원에서 수강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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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는 끝이 없다. 더없이 옳은 말 같지만 생존경쟁을 위한 입시교육과 스펙 쌓기에 지친 직장인 이현지씨(29)에겐 진저리나는 말이기도 했다. “재수까지 해서 대학에 들어가고, 취업 때문에 대학 4년 동안 토익학원에, 자기소개서·면접특강까지 내내 시달리다 보니 ‘학원’ 말만 들어도 거부감이 들었다”던 이씨였다. 그래서 취직 후 5년이 넘었지만 직장인들에게 유행처럼 지나가는 ‘전화영어’도 수강한 적이 없었다. ‘생존능력’을 키우기 위해 평생을 공부하고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에 의도적으로 눈을 감고 지나쳤던 것이다.

“그런데 ‘생존’이라는 말을 어느 날 한 번 곰곰이 되새겨보니 그 자체가 나쁜 말은 아니더라고요. 누구나 살아남아야 하니까. 경쟁에서 남을 밟고 올라서서 살아남는 거야 문제지만, 누구보다 내 인생 만족하며 잘 살려면 뭘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주 52시간 근무제로 늘어난 저녁시간
그래서 이씨는 ‘인생’을 배우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예 ‘인생학교’라는 이름을 건 성인 교육기관도 있었고, 크고 작은 인문학 연구모임에서 여는 특강이나 소모임도 있었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이후 늘어난 저녁시간을 인사·노무관리나 비즈니스 영어 수업으로 채우는 동료들은 많았지만 회사에서 이씨와 같은 수강과목에 관심을 갖는 동료는 드물었다. 그에 비해 철학사를 배우고 심리학과 인간관계에 대해 공부하는 모임은 같은 관심사를 나눌 구성원들이 있어 더욱 즐거웠다.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교육시장이 확대되면서 배움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여전히 업무 연관성이 높은 과목들이 직장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모습은 변함없지만, ‘생존능력’을 강조하는 사교육 흐름 속에서 생존을 보다 폭넓고 다양하게 정의하는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직장이나 업종을 벗어날 수 없으니 경쟁력을 키워 살아남아야 한다는 인식 대신, 퇴사를 하거나 휴직을 해도 좋으니 어떻게든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현실적 방법부터 찾자는 쪽으로 이동하는 모양새다.

‘자신감을 키우는 법’ ‘직장에서 의미를 찾는 법’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법’ 등이 ‘인생학교 서울’에서 진행하는 수업의 제목이다.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브라질 상파울루 등 세계 11개 도시에서 운영 중인 인생학교의 공통된 커리큘럼에 따른 수업을 서울에서도 받는다. 학교와 공부라는 틀을 성인에게 적용시키기는 하지만 인생을 왜, 어떻게 배우고 성찰해야 하는지가 전제돼 있다. 인생학교 서울의 손미나 교장은 “한국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공부할 정도로 학구열에 불타는 사람들이지만 그동안 왜 이렇게 공부하며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배우지 못했다”며 “인생학교 수업을 통해 배우는 사람은 물론 가르치는 사람도 함께 성장하고 변화하며 삶을 살아가는 방향을 점검하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살아남기 위한’ 성인들의 배움이 진행되는 장소는 강의실 문턱을 넘어서기도 한다. 두 자녀의 아버지인 정승규씨(38)는 둘째가 점차 커가면서 같이 놀아주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느낀 게 계기가 되어 ‘힘 쓰는 법’을 배우러 다니고 있다. 정씨가 배우는 종목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파워리프팅’이다. 웨이트 트레이닝의 훈련 중 3대 운동으로 꼽히는 스쿼트·데드리프트·벤치프레스를 최대한 무거운 무게로 들어올리는 것이다. 무거운 바벨을 땅 위에 쿵쿵 내려놓을 때가 많기 때문에 전문 체육관을 찾아 역도선수로도 뛰었던 강사에게서 비법을 전수받는다.

정씨는 “첫아이가 나오기 전까지 헬스장을 꾸준히 다녔기 때문에 육아를 해도 힘에 부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근력 자체가 모자라 아이들이랑 노는 게 지친다는 느낌이 들어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초심과 달리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힘을 키워 육아전쟁에서 살아남으려고 했는데 이젠 그냥 중량을 높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돼버렸다”는 그는 “새로운 PR(개인 최고기록)을 달성했을 때의 성취감이 크기 때문에 없는 시간을 쪼개 전문 특강까지 찾아가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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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와 생존을 결합시키는 유튜버 교육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시장의 규모는 약 2조원 수준으로 업계는 분석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초·중·고 학생의 사교육비 총액인 19조5000억원의 10분의 1을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존 성인 평생교육시장의 주요 과목인 직무 관련 과목 외에도 교양·인문학 교육과 개인의 심리·정서 안정을 위한 상담심리 관련 교육, 그리고 소수 동호인 중심의 취미 교육 등이 전체적으로 확대되는 실정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의 평생학습 참여율 통계를 보면 2013년 30.2%였던 비율은 2018년 42.8%로 크게 올랐다.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의 임민욱 팀장은 성인교육이 늘어나는 데 대해 “이직이나 전문성 확보, 고용불안 상황 대비, 승진·연봉 인상 등 미래를 위한 투자가 목적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40~60% 정도로 여전히 높지만 흥미나 퇴근 후 시간 활용 등의 목적도 10%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취미와 생존을 결합시키는 성인 사교육 움직임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것이 ‘유튜버 단기 양성 코스’다. 앱이나 프로그램 개발 또는 사무용이나 디자인용 프로그램 활용 교육에 치중하던 컴퓨터학원들이 유튜버를 꿈꾸는 지망생들을 새로운 시장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강의내용을 보면 영상 촬영과 편집을 비롯해 자막과 음성, 배경음악 등을 적시에 활용하는 방법은 기본이다. 콘텐츠의 외형이 깔끔해야 더 구독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유튜버들과 차별화를 시킬 수 있는 기획능력을 키우는 수업도 포함돼 있다. 한 학원 관계자에 따르면 4주 동안 교육을 받으면 편집 실력 면에서는 유명 유튜버들 못지않게 된다고 한다.

‘밥벌이’ 목적이 없지 않다보니 유튜버 양성 코스 강의실을 채우는 대다수는 성인이다. 청소년이 20~30%를 차지하지만 성인 중에서도 비교적 연배가 높은 50대 이상 연령대도 비슷한 비율로 보인다. 서울 강남구의 한 학원에서 만난 진모씨(53)도 주식 유튜버로 활동하다가 보다 구독자 수를 늘리려 학원을 찾았다. 진씨는 “개인이 전업 주식투자자로 먹고살 정도는 되니까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분야에까지 발을 넓히는 것도 수익이 될 것 같아 유튜브 영상 제작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돈만큼이나 배움과 취미가 즐거움을 준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유튜버로 크게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겠지만 꾸준히 내 채널을 찾아주는 구독자들과 더 즐겁게 소통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즐거운 기회라고 생각한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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