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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이슈논쟁] 청년은 혁신을 위한 지렛대가 아니다 / 정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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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준영
불평등과 시민성 연구소 연구원


지난 1월 이른바 ‘청년수당 2.0’ 정책실험을 제안하는 자리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정해진 토론 시간의 끝에 “차라리 40~50대 연령에게 지급하는 기본소득으로 ‘중년수당 1.0’을 설계해보는 것은 어떤가” 하고 거꾸로 제안했다. 토론회의 주최 단체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것도 좋은 생각’ 정도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발언의 취지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반응이다. 물론 세대 사이의 갈등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이야기에 주인공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이번 기회에 오해를 바로잡고자 한다.

우선 ‘청년수당 2.0’이라는 명칭은 ‘청년 기본소득’이라는 정확한 표현으로 고쳐 써야 한다. 자기도 모르게 ‘옛날 버전’으로 지목된 기존의 청년수당과 ‘새 버전’을 자임한 청년 기본소득은 같은 집단을 대상으로 소득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일견 유사해 보이지만, ‘정책 원리’라는 측면에서 전혀 다른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청년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아이디어가 지금 시행되고 있는 청년 지원정책을 그대로 대체할 수는 없다.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사업’ 등 기존 정책은 기본 목적에 충실하게 계속 개선해나가고, 청년 기본소득 구상은 그것대로 정직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중년 기본소득’이라는 엉뚱한 이야기는 왜 꺼낸 걸까. 요즘 유행하는 청년 기본소득 제안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기본소득, 청년에게 먼저 주자’는 생각은 보편적 기본소득의 이념과 원리에 어긋날뿐더러, ‘시민의 권리’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혁신을 위한 투자’라는 경제적 가치에 호소하고 있다.

먼저 청년 기본소득은 보편적 기본소득의 이념과 원리에 어긋난다.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나 무조건적으로 일정 금액의 소득을 지급하는 보편적 기본소득 제도는 시민의 보편적 권리에 의해 정당화된다. 시민 모두에게 평등하게 보장되는 ‘권리’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대상과 조건을 따지지 않는 보편적 제도가 성립하는 것이다.(물론, 이 경우에도 국적에 기초한 시민의 자격이라는 높은 문턱이 있다.) 가령 어느 나라에서 ‘한달에 적어도 100만원의 소득을 보장받는 것은 우리 모두의 권리’라는 합의에 이르면, 보편적 기본소득의 제도화를 뒷받침하는 정치적·법적 정당성이 갖춰지게 된다. 따라서 보편적 기본소득의 원리에서는 차등·우선 지급의 논리가 자리할 틈이 없다.

그런데 ‘청년에게 먼저 주는 기본소득’이라는 발상에 닿으면 시민의 보편적 권리는 시야에서 멀어지고, ‘왜 청년에게 (먼저) 지급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답하기 위해 (다른 집단에 비해) 청년이라는 연령 집단이 얼마나 특수하게 취약한지 그리고 그에 대한 ‘투자’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열심히 설명하게 된다.

문제는 동일한 설명 방식으로 ‘중년에게 먼저 주는 기본소득’도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노동시장에서 이탈하거나 산업구조의 변화에 직격탄을 맞더라도, 고용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고 삶의 안정성을 보장받으며, ‘100세 시대’에 ‘인생 이모작’을 충분히 준비할 수 있도록 40~50대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자. 생존의 문제 때문에 소위 ‘혁신’에 반대하는 일도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자, 하나가 우선되어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고통 경쟁의 양상을 되풀이하는 꼴이다.

청년 기본소득이 보편적 기본소득을 단계적으로 도입하기 위한 전략적 출발점이 아니라, ‘그저 청년에게 그것을 주자는 것’이라면 오히려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청년을 시작으로 언젠가는 보편적 기본소득의 이상에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정책 원리’의 측면에서 꽤 심각한 문제가 된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자는 운동 안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저 ‘기본소득’이면 되는가?

‘청년수당 2.0’ 정책실험을 설계한 ‘LAB2050’은 한국의 기존 복지체제를 고용 중심의 ‘가부장적 자유주의’로 비판하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복지국가의 이념적 기초와 현실 모델로서 ‘자유안정성 모델’을 제시하고, 청년 기본소득을 그것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마땅히 환영받아야 할 제안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왜 청년인가’ 하는 질문에 이르면 반전이 일어난다. “청년층에 대한 기본소득 지원은 혁신경제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서 미래 대한민국의 역동성과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투자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며 청년에 대한 지원에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책을 권리의 뒷받침 없이 일종의 투자처럼 설명하면, 정책의 존속을 위해 ‘투자의 효용’을 계속 증명해야 한다. 이때 ‘투자를 받은 대상’은 투입된 비용에 비해 얼마나 산출해내고 있는지 자신의 ‘성과’를 끊임없이 프레젠테이션해야 한다. 이 순간 국가는 ‘가부장’에서 ‘투자자’로 변신하고, ‘권리의 보유자’여야 할 시민은 ‘국가가 산업적으로 관리하는 자원’으로 전락한다. 투자를 유치한 청년은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 혁신을 일궈내야만 한다. 이것은 ‘자유안정성 모델’이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청년은 시민의 다른 이름이지 혁신을 위한 지렛대가 아니다. 그리고 청년 기본소득은 보편적 기본소득의 이상과는 아주 반대로 가는 길이다.



[이슈논쟁 / 청년 기본소득]

지난 1월 서울연구원과 민간 싱크탱크 ‘LAB 2050’이 ‘청년수당 2.0’ 정책실험을 서울시에 제안한 것을 계기로, ‘청년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이 활발하다. 이번 제안은 기존에 서울시가 지원해온 ‘청년활동지원수당’과는 다르게,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청년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하자는 것이 뼈대다. 본격적인 ‘청년수당 2.0’ 정책 실행에 앞서, 서울시에 거주하는 20대 청년 1600명에게 2년간 월 50만원씩 지급하는 정책 실험을 해보자는 것이다.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 기본소득 지급이 바람직한가’를 중심으로, ‘LAB 2050’의 연구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영준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와 정준영 불평등과 시민성 연구소 연구원의 견해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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