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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조용헌 살롱] [1185] 주먹과 족보항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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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안동은 문중마다 400~500년씩 내려오는 이야기가 뭉텅이로 남아 있어서 미시사(微視史)의 온상이다. 예안과 안동, 봉화 일대는 연비(聯臂·혈연, 학연, 혼맥)가 강하게 남아 있는 특수 지역이다. 집안끼리 그물코처럼 사연이 얽혀 있다. 그래서 연비를 무시하고 함부로 개인플레이 하기가 어려운 동네다. 1960년대 중반 안동에 두 명의 청소년 주먹이 있었다. 안동농고에는 김준길(金俊吉)이 있었고, 경안고에는 김건종(金建鍾)이었다. 모두 고1이었지만 싸움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하도 싸움을 잘해서 안동시내 고3들도 함부로 대하지를 못할 정도였다. 마침내 둘이 맞짱을 뜨게 되었다. 김준길은 주먹이 작은 호박만 하였다. 한두 방에 상대를 제압하는 주먹이었다. 이에 비해 김건종은 전반적으로 힘이 좋고 몸이 날랬다. 건종이는 시간만 나면 평행봉, 역기, 덤벨, 줄넘기를 하면서 몸을 다듬었던 것이다. 준길이 아버지는 한학에 조예가 있는 한학자였다. 건종이도 양반 자부심이 강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어느 날 낙동강 상류의 모래사장에서 고교생 수십 명이 관전하는 상황에서 둘이 붙었다. 용호상박으로 치고받았다. 1라운드에 쉽게 승부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중간에 약간 쉬는 시간이 있었다. 두 살 더 많았던 준길이가 건종이에게 말을 건넸다. “너, 김가라고 했지. 집이 어디냐?” “내앞(川前)이다.” “나도 내앞인데, 너 큰파냐? 작은파냐?” “작은파다. 왜?” “그래? 나는 큰 파다”. ‘내앞김씨’들은 5형제가 모두 대과에 급제한 오룡지가(五龍之家)로 유명한 집안이다. 당시 고1이라도 족보 수준이 윗대 5대 항렬까지는 외우는 상태였다. 둘이 싸우다가 문답을 해보니 두 주먹은 청계공(靑溪公) 김진(金璡·1500~1580)의 같은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준길이가 건종이의 아저씨 항렬이었다. 준길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건종아 네가 이긴 것으로 하자.” 싸움을 중지하고 ‘아재’와 ‘조카’로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준길(72)과 건종(70)은 지금까지 50여 년을 각별한 사이로 지내오고 있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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