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오래 전 ‘이날’]2월16일 눈물의 재일조선인 북송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95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59년 2월16일 “처부수자! 일본의 흉계를”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요즘입니다. 60년 전 경향신문을 들춰보다가 “처부수자! 일본”이라는 익숙한 구호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때는 무슨 일이었을까요? 포항, 황간, 양평, 영동, 용인 등 전국 각 지방에서 일본을 규탄하는 ‘국민대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한 고교생은 본통을 참지 못하고 손가락까지 깨물어 혈서를 쓰기도 했다는군요.

당시 불거진 문제는 바로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였습니다. 1959년 1월 일본은 재일조선인의 북조선 송환이 곧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에는 200만 명 정도의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중 140만 명은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60만 명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 중 일부를 북한으로 보낸다는 얘기인데요.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요?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재일 동포는 식민지 시대 일본이 강제로 징용·징병했다가 잔류하게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국으로도 돌아가지 못한 이 분들은 국적도 없었고 차별과 냉대에 시달렸습니다. 김귀옥 한성대 교수에 따르면 1952년 재일조선인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무직자 비율이 62%였고 취업자도 일용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이 재일조선인들을 골칫거리로 여기게 됩니다. 필요할 때는 국적을 강제로 부여하면서까지 데려다 썼던 이들을 이제는 필요없어졌다고 국적마저 주지 않고 내쫓으려 한 셈이지요. 일본은 이를 거주이전의 자유 등의 인도주의적 목적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재일조선인에게 들어가는 복지 비용 등의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재일조선인에게 법적 지위를 보장하고 영주권을 주어야 한다고 일본에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한일 수교조차 이뤄지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한국으로 이들을 보내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중국 지원병의 철수로 노동력이 부족하던 북한은 재일조선인 송환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한국 정부는 극렬하게 반발합니다. 이날 경향신문 사설은 “자유민을 공산지옥으로 넘겨주려는 일본 정부의 비인도적 배신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태평양 침략 전쟁 당시 강제로 끌어갔던 우리 동포를 또 다시 공산 독재 하 노예노동자로 보낸다”는 표현까지 쓰고 있습니다.

2월20일에 열린 북송 반대 국민대회에는 3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가해 “재일동포를 공산당에게 팔아먹으려는 불한당 같은 일본놈들과 정면으로 싸우자”는 울분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정부가 북송을 맡고 있던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를 위해 공작원까지 파견했다가 발각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경향신문

1959년 2월13일, 재일동포 북송규탄 국민대회에 참가한 서울시민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과 협의를 계속해 1959년 8월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조인하게 됩니다. 12월에 975명의 제1진이 니가타 항을 출발한 이래 1984년까지 모두 9만 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북한으로 이주합니다. 그들의 처와 자식 중에는 재일조선인이 아닌 일본 국적을 보유한 일본인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북한이 아닌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남한 출신이었으니 진정한 의미의 귀환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일본 정부는 다시 일본에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숨겼습니다. 이들은 결국 원치 않는 이산가족이 되고 맙니다. 북송으로 인해 남한 가족·친지들과의 교류도 불가능해졌고 원거주지 일본의 가족들과도 교류가 제한됐습니다. 남한의 이산가족들은 연좌제에 대한 공포로 일본이나 북한에 거주하는 이산가족들을 부정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공짜로 집을 주고 일자리도 보장하며 복지도 확실하다는 북한이 ‘지상 낙원’이라는 선전을 믿고 왔지만 생활은 열악했습니다. 조국이라고 찾아간 곳에서는 이들을 ‘째포’ ‘반쪽빠리’ 등으로 부르며 멸시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동포들이 일본을 그리워하다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1962년 북송선을 타고 건너 간 사람 중에는 현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어머니인 고용희(1952~2004)도 있었습니다. 고용희는 나중에 만수대 예술단 무용단원으로 활동하다가 김정일의 아내가 됩니다. 그가 낳은 아이들이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입니다. 재일조선인 북송이 뜻하지 않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셈입니다.

경향신문

북한행 선박 객실에서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재일조선인들.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를 다룬 테사 모리스-스즈키 호주국립대 교수의 저서 <북한행 엑소더스>에 수록된 사진.


비극으로 점철된 재일조선인 북송 사업은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이 녹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겪지 않았더라면, 분단이 되지 않았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들이죠. 자신들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일본의 태도 역시 아직까지도 여전합니다.

재일동포 북송에 따르는 비용은 북한이 부담했습니다. 북송에 동원됐던 배는 만경봉호였습니다. 만경봉은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부근의 낮은 언덕 이름인데요. 여기에 오르면 대동강과 주변의 만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높이가 45m에 불과하지만 북한 주민이라면 누구나 방문하기를 선망하는 성지라고 하네요. 만경봉호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김일성 주석은 1992년 북한 최고 영예인 김일성 훈장을 수여할 정도였습니다.

그 만경봉호가 노후화되자 북한은 총련의 성금으로 1992년 ‘만경봉 92호’를 건조했습니다. 이 배는 지난해 현송월 단장이 이끄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140명을 태우고 강원도 동해 묵호항으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합니다.

경향신문

최초의 재일 교포 북송선 토보로스크호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