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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북한은 ‘핵이란 독을 바른 토끼’…한반도 중립화 기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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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한국수학문화연구소장 김용운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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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니 새 지식을 축적하진 못하지만 가지고 있는 지식에 자극을 줄 수는 있어요. 지식을 융합하고 통합하는 능력은 새로 생긴 것 같아요.”

원로 수학자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의 말이다. 올해로 만 91살인 김 교수는 지금껏 100권가량의 책을 냈다. 일본어로 나온 책도 25권이나 된다. 저술 목록엔 <한국 수학사> <중국 수학사>와 같은 전공 책 외에 한국과 일본을 비교 분석하는 책도 여럿이다. 1988년 나온 <일본의 몰락>은 90년대 일본 버블 경제의 붕괴를 예측해 화제가 됐다. 역사 비전공자인 김 교수는 한·일 고대사를 독학해 일본 건국의 모태가 한국이며 일왕의 뿌리가 한국인이라는 주장을 해왔다. 지난 5월에도 21세기 역사를 ‘대국에 대한 소국의 역습’으로 규정한 <역사의 역습>(맥스미디어)이란 책을 냈다. <풍수화-원형사관으로 본 한ㆍ중ㆍ일 갈등의 돌파구>를 낸 지 4년 만이다.

지난 14일 서울 강남역 부근 한국수학문화연구소 사무실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그는 이 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다. “다음 책은 구조주의의 미래를 다룰 겁니다. 이를 위해 지금 놈 촘스키의 언어학 책을 읽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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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현재 국제정치를 북한과 같은 소국이 대국인 미국에 ‘너도 죽고 나도 죽자’며 맞서는 상황으로 봤다. 북한을 두고 핵이란 독을 몸에 바른 토끼와 같다고도 했다. 트럼프가 북한을 상대로 핵 협상에 나선 데는 ‘독 바른 토끼’에 현실적으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란다.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소국이 핵을 가지면서 대국과 소국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진단이다. 이런 역사 전개는 한반도에 위기이자 기회라고 했다. “한국 정부는 중국·러시아 대륙세력과 미국·일본 해양세력의 협조를 끌어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비핵화, 한반도 영세중립화, 동북아문화공동체’란 황금의 삼위일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 ‘역사의 역습’? “난 이 시점을 인류 문명사의 한 분기점이라고 봐요. 종교와 과학, 기술 문제도 그렇고 패권 국가의 헤게모니도 기존 페이스대로 가지 않고 한계에 도달하고 있어요. 이런 시대의 의미를 역습으로 본 거죠. 새 시대가 열리고 있어요. 2001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린 9·11테러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 한국 상황을 보면서 확신하게 되었죠.” 미국이 북한과 핵 협상에 적극적인 데는 핵 공포도 있지만 트럼프의 이해타산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트럼프가 변덕스럽다고 하지만 그의 사고는 미국이 1948년 이후 해온 한반도 정책의 축소판이죠. 미국 정책은 직선적으로 오지 않았어요. 당이 틀리면 달라지고 같은 당이라도 대통령이 바뀌면 달라집니다. 카우보이 같은 대통령도 있고 선교사 같은 대통령도 있어요. 트럼프는 이를 전부 합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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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립화론은 언제부터? “해방 직후부터 한국의 길은 중립화밖에 없다고 봤어요. 이승만 시대에는 그런 말 하면 빨갱이라고 했죠. 진보는 기회주의자라고 했고요. 한국인의 사고는 단선계이고 외곬이죠. 역사 체험과 지정학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언제나 이자택일을 강요해요. 이는 위험해요. 이런 나라일수록 유연한 정책이 필요해요.” 그는 민주화로 정치적 상황이 바뀌었어도 한국인의 원리적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그는 책에서 한국엔 외교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 이유는 1250년 동안 사대에 길들었기 때문이란다. 신라의 사대 정책 틀이 조선 시대 그리고 분단까지 이어져 한반도인이 스스로 위상을 수립할 의욕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외교는 어느 나라 한쪽에 기우는 것은 좋지 않아요. 한국과 같은 지정학에선 언제 어디서든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어요.” 책에는 “35년간의 (일제) 식민지 통치에는 신경질적으로 자학하면서 1250년간의 사대 사관에는 둔감한 우리”라는 표현도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친일파라는 소리를 바로 들을 것 같다고 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1250년과 35년 중 어디가 더 깁니까? 단순 비교해도 알 수 있죠. 민족적 자존심을 어디서 더 많이 훼손당했죠. 일제 시대에는 저항운동이라도 했는데, 사대엔 저항했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어요. 오히려 동방예의지국 운운하면서 사대를 합리화했지요.”

올해 91살 고령에도 끊임없이 집필
인류 문명사 다룬 ‘역사의 역습’ 출간
“21세기 소국이 대국에 대드는 형국”


도쿄 출생 해방 이후 부친 고향 나주로
수학 전공…물리·문학·철학 등 융합
“문·이과 선택 강요해 ‘바보’만 양산”


그는 1927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 공대에 들어간 1945년 해방을 맞았다. 1년 뒤 아버지 고향인 전남 나주로 돌아왔다. 교사 시험에 합격해 광주에서 수학 교사를 10년가량 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박사 과정은 캐나다 앨버타대에서 수료했다.

김 교수의 저술을 보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구분이 없다. 수학과 물리학이 문학과 역사, 철학과 뒤섞인다. “아버님이 1915년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가셨어요. 일본에선 주물 공장을 하셨어요. 땅도 있었죠. 나주로 돌아온 뒤엔 작은 과수원을 하셨어요. 그때 과일을 쌀 종이가 필요했어요. 일본 사람이 버리고 간 좋은 책이 표지가 뜯긴 채 과수원에 많이 있었죠. 내가 커버를 다시 만들어 나만의 도서관을 만들었어요. 60여 권 정도 됐나요. 그리스 철학 분야 등 좋은 책이 많았어요.” 그는 해방 직후 활자에 굶주렸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주 시골집 방에 일제 때부터 붙여 놓은 약 광고와 교과서 종이가 있었어요. 읽고 또 읽어 다 외울 정도였죠.” 일본에서 보낸 중·고교 시절은 어땠을까? “일본에서는 전쟁 중에도 ‘교양주의’란 게 있었어요. 철학과 문예 쪽은 서양의 중요한 책이 다 번역되어 있었죠. 학교에선 책 100쪽을 읽을 때마다 별 1개씩 (표식을) 학생들에게 주면서 독서 경쟁을 시켰어요. 나쓰메 소세키 소설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읽기 시작했죠.”

해방 공간(45~48년)에는? “서울 쪽 대학에 가려고 동창을 만났더니 국대안 반대운동 한다고 돌아다니더군요. 대학이 아니었죠. 한국말도 잘 못 하고 (친구들은) 공산주의 운동에 날뛰어서 외롭게 책만 보았죠.” 그는 당시 ‘공산주의 운동’에 나선 이들을 두고 “시기심과 정치 욕심이 많았다”고 했다.

김 교수는 자신의 대표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로 1983년 한국수학사학회를 만든 일이라고 했다. “내 책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게 <한국수학사>입니다. (학회를 만들 때) 수학자 중 수학사를 한 분이 거의 없었어요. 지금도 내 책이 후배들한테 표준 텍스트라고 해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만들 때 리만 기하학이란 새 기하학 원리를 이용했어요. 리만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바뀐 것이죠. 수학사를 아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수학은 곧 인문학이라는 말도 했다. “20세기에 구조주의 언어학이 나왔잖아요. 수학과 언어학이 같은 원리라고 선언한 것이죠. 촘스키 언어학의 구조가 뭔가, 수학자들이 봤는 데 그게 바로 (수학의) 그룹 이론이거든요. 나의 구조주의 역사학도 같아요. 표층과 심층을 같이 봐야 한다는 것이죠. 표면적 사실을 심층 구조에 연관 지어 보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적 사건은 우리의 현재 사고방식을 결정하고 그 사고방식이 미래 문화를 만듭니다.” 말을 이었다. “프랑스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지질학과 마르크시즘, 정신분석학과 인류학은 같다고 했어요. 지질학은 땅 밑과 땅 위를 나눠 보잖아요. 마르크시즘은 상부와 하부 구조를, 정신분석학은 눈에 안 보이는 무의식을 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 원시 부족이 딸을 모계 사촌과 결혼시켜 근친결혼을 피해온 사실을 밝히잖아요. 이것도 집단 무의식의 지혜가 반영된 것이죠.”

그는 자신이 주창해 온 ‘구조주의 원형사관’을 두고 역사 전공자들과 토론을 하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역사학계에서 불러주면 가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한국 역사학계는 역사철학을 하신 분들이 적더라고요.” 그는 공동체의 역사를 반영한 집단 무의식을 원형이라고 부른다. 이 원형과 풍토(환경)가 되먹임되면서 언어와 역사를 발달시켜왔다는 것이다. “역사는 민족의 집단 무의식과 지정학이 얽힌 복잡계로 봐야 합니다.” 치수를 예로 들었다. “일본은 100개의 분지가 높은 산맥으로 분할되어 있어요. 이 분지들이 각각 독립적 지역 단위여서 일본인들은 자신의 말을 내세우지 않아요. 한국은 권력자가 치수에 관심이 없어 권력에도 할 말을 하고 나를 내세우지요.” 그가 보기에 한국 역사의 큰 분기점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와 왜 연합군을 패배시긴 백강 전투(663년)다. 이 전투 이후 한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충돌 장소가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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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교육 얘기가 나오자 김 교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제 시대 경성제대 철학과 교수였던 아베 요시시게는 한국은 천재가 나오는 나라라고 했어요. 니체가 그리스를 방문했을 때 하늘이 맑고 머리에 자극을 주는 날씨라고 했는데, 한국 날씨가 그리스와 같다는 것이죠. 한국 사람들이 머리가 좋은 데 천재가 나오지 않는 것은 교육 탓입니다. 소크라테스를 보면 길을 가다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고 토론하잖아요. 우리도 이런 전통이 있었어요. 그런데 주자학 원리주의에 빠져 사라졌어요. 조선 시대를 보면 일부 실학자를 빼면 지적 정직성이 없어요. 지금은 대학 입시가 주자학을 대신하고 있어요.”

그는 구체적으로 한국과 일본 수학 교육을 비교했다. “한국은 문제풀이로만 갑니다. 일본은 원리와 역사적 배경을 가르쳐요. 될 수 있으면 근본적인 접근을 하죠.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시험 수학’은 있지만 ‘수학 교육’은 없어요.” 그는 “한국 인문학자들은 수학을 모르니 구조주의를 연구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문과와 이과로 나누는 한국 교육은 ‘학문적인 전문 바보’만 대량 생산합니다. 새로운 지적 사고를 구축하려면 문과와 이과를 나눠선 안 됩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라고 했다. 이유는 러셀의 지적 정직성 때문이란다. “러셀은 이성주의자이죠. 서양의 귀족 전통에서 나올 수 있는 인물입니다. 영국에서 가끔 이런 분이 나옵니다. 우리도 그런 전통이 있는데 살리지 못했죠. 가장 좋아하는 책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아요. 러셀의 <서양철학사>이죠.”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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