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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형사절차 필요하다"면서 "수사촉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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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김종훈 기자] [the L]레터] 전국법관회의 '정무적 판단'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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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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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 같을 수도 있습니다만…. 저희는 표현 하나하나 굉장히 신경썼습니다."

지난 11일 전국법관대표회의(전국법관회의) 간사를 맡고 있는 송승용 부장판사가 기자 브리핑을 하다 멋쩍게 웃었다. 전국법관회의가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에 대해 의결한 사항을 설명하던 중이었다. 이날 법원 안팎의 관심은 전국법관회의가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검찰 고발장을 제출하라고 요구할지 여부에 쏠려있었다.

이날 전국법관회의가 내놓은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대해 형사절차를 포함하는 성역없는 진상조사와 철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 한다." 형사절차란 무엇을 뜻하는지, 김 대법원장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인지 의미가 불분명했다. 취재진이 추가 설명을 요구하자 송 부장판사는 "(형사절차는) 수사와 기소, 재판 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수사와 기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게 무슨 차이일까. 송 부장판사는 "촉구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수사와 기소가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검찰이라는 주체가 전제돼 있다. 검찰을 향해 수사, 기소를 하라고 주장하면서 촉구하는 것은 아니라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송 부장판사도 브리핑 도중 "저도 이 결의사항을 갖고 오면서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까 난처했다"고 난색을 표했다.

의결문 속에는 또 다른 오류가 숨어있다. 의결문을 보면 이날 관심사였던 김 대법원장이 검찰에 고발장을 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빠져있다. 이에 대해 묻자 송 부장판사는 "대법원장이 직접 형사조치를 취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게 대부분의 의견이었다"고 답했다. 사법부 수장이 수사를 요구할 경우 재판공정성 논란을 부를 수 있다는 그간의 우려를 의식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법관회의 의결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의결문에서 전국법관회의는 법관은 독립된 존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관이 정말 독립된 존재라면 누가 고발장을 냈든 법과 원칙만 보고 공정하게 재판을 하면 된다. 그러나 전국법관회의는 고발장에 대법원장 이름이 적히면 재판이 흔들릴 수 있다고 걱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최고 엘리트라는 판사들이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은 엄격한 논리가 아닌 정무적 판단에 따라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의결문의 초점은 어떻게 하면 정치적인 부담을 피하면서 적당한 '액션'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맞춰져 있다. 의결문에서 김 대법원장 이름을 슬쩍 뺀 것, 수사와 기소라는 명확한 단어 대신 형사조치라는 애매한 단어를 집어넣고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은 것 모두 이런 고민의 산물이다. 법관 독립을 외쳤지만 어떻게 하면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법관사찰의 피해자인 차성안 판사는 의결내용을 보고 "정무적 판단의 말들만 오가는 것이 판사들의 회의에 어울리는 모습이냐"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장 고발 시 재판할 때 눈치를 안 볼 수 없고 그래서 재판 독립 침해라는 법관관료화의 자기 고백을 당당히 하며 재판을 맡을 동료판사를 보호해줘야 한다는 논리를 서슴없이 내세우는 것을 보고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며 "판사도 법대로 안 하는데 누가 누구에게 법대로 살라며 법 위반을 단죄할 자격이 있느냐"고 물었다.

전국법관회의는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의 불씨를 당긴 곳이다. 지난해부터 줄기차게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와 책임규명을 요구하면서 사법부 신뢰를 바로 세우는 과정을 주도했다. 그러다 전국법관회의가 막판에 와서 논리도, 이렇다 할 명분도 없이 입장을 선회했다. 전국법관회의 결과를 지켜보겠다던 김 대법원장은 결국 "섣불리 고발이나 수사 의뢰와 같은 조치를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내며 검찰에 공을 넘겼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는 상고법원 도입에 목을 맨 법원행정처의 과도한 '정무적 판단'에서 비롯됐다. 이를 비판해온 전국법관회의가 스스로 '정무적 판단'을 도피처로 삼은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원행정처부터 일선 법관들까지 법관으로서의 논리와 양심보다 '정무적 판단'에 기대는 사법부를 국민들이 어떻게 신뢰하겠는가? 사법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김종훈 기자 ninachum2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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