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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여기자도 쉬운 ‘님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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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직업상 다양한 사람 만나는 탓에 성폭력 위험에 노출된 여기자들의 #미투…

검찰·대학·국회 등 가부장 권력기관 속성 반영


한겨레21

2월5일 통영YWCA 등 경남 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서지현 검사가 근무하는 창원지검 통영지청 앞에 모여 서 검사 지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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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이맘때 다른 매체의 기자로 일할 때였다. 늦은 밤 선배가 불러 찾아간 노래방에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사람이 만취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고급 취재원 앞에서 마냥 황송했다. 폭탄주를 주는 대로 마시고, 시키는 대로 노래도 불렀다. 집에 가도 된다고 해서 노래방을 나섰는데, 술에 취한 선배가 쫓아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잘 들어가.”

택시비 하라며 돈도 줬다. 10년이 지난 지금 조각난 기억의 정황만으로 그날 그들이 나를 기자가 아니라 도우미로 이용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태어나서 처음 겪은 성추행의 기억만큼은 조각나지 않고 또렷하게 남아 있다.

여기자와 블루스 추려던 의원

검찰 조직과 문단 내 성폭력 관행과 그 은폐 구조를 고발한 서지현 검사의 #미투와 최영미 시인의 #미투가 나온 뒤 가해자의 실명을 공개하고 있진 않지만, 자신들의 성추행 경험을 공유하는 #미투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형식과 내용이 조금씩 다른 #미투들은 결국 하나의 본질로 수렴된다. 성폭력이 이뤄지는 그 순간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후배 검사나 동료 문인이 아닌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미투의 표적이 된 안태근 검사나 ‘En 시인’ 등 가해자들이 부인할 수 없는 ‘팩트’다.

모든 성범죄는 ‘여성 혐오’에서 시작된다.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경향신문> 2월7일치에 기고한 글 ‘검찰 간부의 성폭력, 그 이후’에서 “성폭력이 가부장제의 낡은 관습이며, 그 뿌리가 성차별과 여성 혐오와 연결되어 있다. (중략)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존엄한 존재이며 평등한 존재라는 기본적인 인식이 정착되지 못할 때 위계적인 권력 조직은 성폭력을 양산해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미투가 겨냥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적확하게 짚어낸 지적이다.

“회사에서 대기업 홍보 담당 임원들을 불러서 대접하는 행사가 있었다. 불러서 나갔다. 노래도 하고 술도 먹는 술집에 가서 노래를 하는데, 한 임원이 다가와 블루스를 추려고 했다.”(ㄱ기자)

“정치부 출입할 때 한 국회의원이 여기자들과 따로 만난 뒤 노래방에 갔다. 노래방에서 여기자들한테 나이순으로 앉아보라고 했다.”(ㄴ기자)

“대학교수들과 출입기자들이 저녁 먹는 자리였다. 술 취해서 늦게 도착한 한 교수한테 명함을 내밀자 자기 명함 대신 신용카드를 꺼냈다. 술집에서 이렇게 하나 싶었다.”(ㄴ기자)

“강남 지역 의사들 모임에 취재를 나갔다. 한 성형외과 의사가 “뽀뽀하자, 우리 집에 가자”고 했다. 뿌리치고 도망치듯 나왔다. 유부남이었다. 전화 취재할 때 의사들이 목소리가 예쁘다며 만나자고 하거나 성적인 농담을 할 때가 있다.”(ㄷ기자)

직업 특성상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 여기자들에게도 대한민국은 언제든 성추행·성폭행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사회다. 여기자들은 검찰, 법원, 대학, 국회 등 공고한 가부장제가 구현된 권력 조직을 ‘출입처’ 삼아 제2의 직장처럼 드나든다. 출입처에서 겪은 여기자들의 성폭력 경험은 남성 중심적인 조직 내부에서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인 성폭력을 엿볼 수 있는 리트머스시험지다. 여기자들은 외부인인 탓에 내부자보다 피해 사례가 공개되기 쉽기 때문이다. <한겨레21>은 #미투의 종착역을 가늠하기 위해 여기자들의 #미투에 귀를 기울여보기로 했다.

검찰, 여기자 성추행 사건 단골

한겨레21

서울대 자연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은 1990년대 여성운동에 한 획을 그었다. 1998년 2월 대법원이 성희롱을 인정하지 않은 2심 판결을 파기환송한 뒤 열린 승소 축하연 모습. 맨 왼쪽에 당시 피해자를 변호했던 박원순 서울시장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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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여기자 성추행 사건의 단골 주인공이다. 2012년 3월 최재호 서울남부지검 부장검사는 기자들과 상견례 자리에서 일간지 여기자 2명의 허벅지와 얼굴을 만지는 추행을 하며 “예전에 알던 여자와 닮았다” “집이 어디냐, 나랑 몰래 나가자” 등의 성희롱을 했다. 안태근 검사의 성추행과 달리, 최 부장검사는 이 사실이 보도된 뒤 바로 직위 해제됐고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2013년 12월 이진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기자들과 송년회 자리에서 여기자들의 허리를 감싸안거나 어깨를 주무르는 등의 추행을 했다. 당시 피해 기자는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나온 뒤 자신의 경험을 기사로 썼다(<한겨레> 토요판 2월3일치 ‘검찰 간부 성추행 피해 기자가 서지현 검사에게 띄우는 편지’).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서성거리다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다. 아직까지도 당시 이진한 전 검사의 행동을 묘사하는 게 힘들다… 우연이겠지만 안태근 전 검사와 이진한 전 검사의 행위는… 세부적인 행동마저 유사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진한 검사는 최 검사와 달리 직위 해제되지 않았고, 검찰총장 ‘경고’ 처분을 받는 데 그쳤다(경고는 공식적인 징계가 아니다). 2014년 2월 피해 기자가 강제추행 혐의로 그를 고소했지만, 검찰은 2015년 11월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2016년 2월 검찰을 떠난 그는 현재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 별일 없이 산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ㄱ기자는 검찰 출입 당시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대검찰청 간부 검사였다. 술자리에서 자기 손으로 내 뒷덜미를 계속 주물럭댔다. 계속 몸을 피했는데도 추행을 멈추지 않았다. 회사 선배가 와서 자리를 바꾼 뒤 끝났다. 문제제기를 할까 생각했지만 ‘겨우’(?) 이 정도 사건에 그렇게까지 하면 선배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오히려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이진한 검사 성추행 사건 이전의 일이다. 만약 그때 내가 문제제기를 했으면 다른 여기자들이 피해를 안 당했을까.”

여기자는 자신이 속한 매체에서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언론사도 한국 사회의 일반 가부장적 권력 조직과 유사하다. 사회부에서 한 대학교를 출입하다 성희롱 피해를 당한 ㄴ기자의 사례를 보자. “모 대학 교수들과 출입기자들이 단체로 저녁을 먹었다. 맞은편 교수가 ‘내 첫사랑을 닮았다’며 나를 여자로 대하는 농담을 계속 던져 불쾌했다. 중간에 먼저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나오다보니 출입구에 뒀던 가방이 없었다. 그 교수가 들고 있더라. 가방을 달라 하고 나와 택시를 탔는데 그 교수가 ‘둘이 한잔 더 하자’며 막무가내로 택시에 타려고 했다.” 그는 회사에 문제제기를 하려 했지만, 주변인들이 “너만 다친다”며 말렸다. 결국 그는 교수에게 개인적 사과를 받고 그때 일을 묻기로 했다. 교수는 ㄴ기자에게 “내 딸이 대학 신입생이다. 절대 알려지면 안 된다”고 읍소하며 용서를 빌었다.

“몸 취재할 땐 언제고 예민하게 군다”

여기자가 성폭력 피해를 호소할 경우 회사 다음으로 중요해지는 공간은 출입기자단이 모인 기자실이다. 이 공간에서 일부 남기자들은 피해자를 흉보며 2차 가해를 한다. ㄱ기자는 이진한 검사 때 겪은 일화를 들려줬다. “남기자들 사이에서 ‘여기자들은 ‘몸 취재’할 때는 언제고, 저렇게 예민하게 군다’는 말이 돌았다. 남기자들이 검사들한테 친절한 여기자들 ‘뒷담화’를 많이 한다. 그 기자가 단독기사를 쓰면 몸 취재로 쓴 거라고 욕한다.”

2000년대 후반 검찰과 법원에 출입했다는 ㄹ기자도 남기자들이 여기자들의 취재 능력을 훼손하는 여성 혐오적 발언을 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 “주변 다른 여기자들이 이런저런 스캔들에 많이 시달렸다. 취재를 열심히 해서 기사를 써도, 예뻐서, 성적 매력으로 접근해서, 남자 판사가 여기자를 좋아해서 따위의 소문이 돌았다. 공부 열심히 하고 밑바닥 취재를 해 좋은 기사를 쓰면, ‘역시 현장에는 여기자가 있어야 해’ ‘이런 취재는 여기자가 가야 해’라고 말한다. 업무 성과를 내도 칭찬인지 뭔지 애매한 말들을 듣다보니, 실제 취재원이 ‘내가 여자라서 마음을 연 것인가’ 나도 헷갈렸다.”

여기자가 여성의 시각과 감수성으로 쓴 기사의 의미가 훼손되는 경우도 많다. 2016년 7월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민중은 개돼지’ 발언을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가 대표적이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당시 경험을 담담히 털어놨다. “여자 부장과 여기자 둘이 남자 관료 하나 자빠뜨렸다는 시각도 있었다. 성별로 그 자리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차별적이라고 생각했다. 문제 있는 발언을 했고, 정상적으로 기사를 썼다. 왜 성별이 화제가 돼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외교부 고위 간부의 ‘여자는 열등하다’는 여성 비하 발언을 보도한 <세계일보> 여기자도 기사를 쓴 뒤 해당 간부를 두둔하는 일부 기자들의 음해로 곤욕을 치렀다. 해당 간부를 비호하는 반박 기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쓴 이는 동석한 남기자였고, 기자단의 다른 남기자는 ‘피해자면 고소를 해야지 왜 기사를 쓰냐’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제1186호 사회 ‘여혐 발언 외교부 간부를 비호하라’ 참조) 전형적인 2차 피해다. 해당 간부는 최근 중앙인사위원회에서 경징계 결론이 났지만, <세계일보>를 상대로 정정보도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몰랐던 것처럼 놀란 척

여성전문기자였던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언론이 여성들의 #미투 보도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대다수 언론사가 여성 문제를 보도하기 싫어했고, 뉴스 가치도 낮게 평가했다. <중앙일보>가 여기자를 한 기수에서 5명을 뽑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경쟁지에서 ‘중앙일보가 망하려고 별짓을 다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동안 여성 문제를 대해온 역사가 있는데, 마치 다들 몰랐던 것처럼 놀란 척을 하니 당황스럽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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