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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전문가의 세계 - 문경수의 탐라도 탐험] (6) 멸종위기 식물도, 아픈 역사도…‘비밀의 숲’은 말없이 보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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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숲, 곶자왈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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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은 전 세계에서 제주도에만 있는 독특한 숲이다. 그만큼 독특한 생태계다. 제주도에서 곶자왈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넓지 않다. 하지만 곶자왈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또 다른 제주를 만난다.

제주어로 곶은 ‘숲이 우거진 곳’을 말하고, 자왈은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서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이라는 의미다. 언제부터 곶자왈이란 단어를 사용했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탐라순력도나 조선시대 고지도를 보면 ‘곶’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는 곶자왈이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옛날부터 곶자왈은 돌이 많고 토양이 부족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불모지로 여겼다. 제주 사람들은 곶자왈에 농사를 짓는 대신 땔감을 얻거나 소나 말의 방목지로 사용했다. 내륙지방에서 해발 200~400m에 위치한 산악지대라면 산간농업이 발달했겠지만 제주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했다. 바로 화산이 만든 독특한 환경 때문이다.

■ 곶자왈 연구의 선구자 송시태

제주도를 탐험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곳이 곶자왈이다. 곶자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됐고, 아직 진행 중이다. 더불어 지질, 생태, 문화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가 필요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김완병 박사의 소개로 곶자왈 연구의 선구자인 송시태 박사(사진)를 만났다. 그는 어린 시절 노닐던 고향 제주의 바다를 좀 더 알고 싶어 제주대학교에서 해양지질학을 전공한다. 졸업 후 일본 유학을 결심했지만 아내의 임신으로 유학을 미루고 고향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보람이었지만, 교직생활과 병행하기 좋은 연구 주제를 찾던 중 고향인 제주의 자연을 떠올린다. 사면이 바다고 물이 귀한 제주의 특성을 감안해 지하수 분야를 연구하기로 결심한다. 제주도는 강수량 대비 강이나 하천이 적고 대신 지하수 함양량이 풍부한 지역이다. 그는 지하수를 연구하며 제주 전역을 답사했다. 어느 지역은 비가 내리면 마을에 물난리가 나는 반면, 특정 지역은 비가 아무리 내려도 배수가 잘돼 물난리가 나지 않았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그저 동네마다 기후가 다를 뿐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안지대는 지형이 비슷한데 왜 배수 차이가 발생하는지 궁금했다. 실마리를 찾기 위해 숲을 조사하던 중 넝쿨이 복잡하게 우거져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숲을 발견한다.

그날부로 숲은 그의 연구 현장이 됐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가시덤불과 잘게 쪼개진 돌멩이가 많았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이 숲 인근에 있는 마을에는 물난리가 난 적이 없었다. 그는 유레카를 외쳤다. 엄청난 양의 빗물을 지하수로 바꿔 저장해 주는 곳이 이 숲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를 거듭하며 숲 일대에 쪼개진 돌멩이가 많고 용암동굴 상부가 함몰된 지형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쪼개진 돌 틈 사이로 빗물이 모이고, 함몰지에 생긴 숨골(돌틈)로 물이 들어간다. 곶자왈 지대가 제주도의 지하수를 저장하는 장소라는 사실은 그렇게 한 연구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송 박사는 전공인 지하수와 연계하기 좋은 주제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 꾸준히 곶자왈을 연구했다. 용암동굴이 많은 제주의 특성상 동서남북 지역의 지하수 방향이 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확인하기 위해 연구팀을 조직했다. 우선 네 팀을 만들어 제주도의 동서남북 지역에 대기한 후 25시간 동안 지하수 관정을 측정했다. 자동센서가 없던 시절이라 지하수 수위를 측정하는 장비를 직접 만들어야 했다. 전기선에 납을 두 개 달아 건전지를 연결하고 벨이 울리는 버저를 달았다. 첫 번째 납이 지하수에 들어가고 두 번째 납이 물에 잠기는 순간 전류가 흘러 버저가 울릴 때 깊이를 재는 원리다. 네 팀은 동일한 시각에 각자의 위치에서 지하수 수위를 측정했다. 25시간을 측정한 이유는 지하수가 조석의 영향을 받는지 검증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얘기를 듣고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히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검증한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스탠리 에딩턴의 실험에 견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딩턴은 1919년에 있을 일식을 관찰하기 위해 두 탐험대를 조직했다. 그는 태양의 중력장에 의해 빛이 휘는 정도를 측정하여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하고자 한 것이다. 에딩턴은 1919년 5월29일 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아프리카 근처의 프린시페섬으로 탐험을 떠났다. 에딩턴이 찍은 개기일식 사진 중 하나가 아인슈타인의 논문에 게재되었고, 이는 명백히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라 빛의 휨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학사의 중대한 이정표로 불리는 에딩턴의 실험에 견줄 만한 실험이 십수년 전에 제주도에서 재현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분명 견줄 만하다. 곶자왈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질 때쯤 제민일보 등 언론과 지질학자, 식물학자가 함께한 최초의 곶자왈 탐사보도팀이 꾸려졌다. 곶자왈의 식물을 처음 접한 식물학자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다. 희귀종과 멸종위기종이 곶자왈 안에서 고립된 진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곶자왈은 억겁의 시간을 견디며 재발견됐다.

■ 숨 쉬는 땅 선흘곶자왈

제주의 대표적인 곶자왈 지대인 선흘곶자왈로 향했다. 제주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선흘곶자왈은 거문오름 분출로 형성된 용암지대 위에 만들어진 숲이다. 2011년 개정된 제주특별자치도 곶자왈 보전 조례를 보면 “용암의 암괴들이 불규칙하게 얽혀 있고, 다양한 동식물이 공존하며, 독특한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는 보존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명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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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동백동산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해설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했다. 햇빛이 좋은 밖과 달리 숲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탐방로 주변으로 어지럽게 얽혀 있는 식물과 검은 암석들을 보니 으스스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선흘이라는 지명이 착한 기운이 흐르는 동네라는 말을 듣고 이내 안심이 됐다. 잠시 후 해설사가 탐방로 왼쪽으로 난 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멀찌감치 토틀굴이란 안내판이 있고, 그 옆으로 철 구조물로 막힌 동굴이 보였다. 토틀굴은 흔히 보는 용암동굴이 아니라 4·3 사건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토틀굴은 4·3 사건 당시 마을 주민들의 은신처로 쓰였다. 화산활동으로 생긴 용암동굴이기 전에 슬픈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다. 수백 번도 넘게 했을 설명이지만 해설사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4·3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민간인 사상자(3만명)가 난 슬픈 근현대사다. 자연의 원형을 보겠다고 찾은 숲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를 마주했다.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잠시 묵념을 했다. 곶자왈은 생태탐방로를 넘어 제주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역사교육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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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보니 11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숲이 푸르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곶자왈은 연중 푸르게 우거진 숲을 이룬다. 이는 추운 겨울에도 따듯한 기온과 수분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바로 숨골이라고 불리는 함몰지형 덕분이다. 숨골은 용암동굴이 함몰되면서 바위와 바위 사이에 생긴 틈이다. 이 크고 작은 바위틈이 곶자왈의 심장 역할을 한다.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물이 숨골로 유입돼 지하수로 저장된다. 빗물의 80%를 저장하는 숨골은 수분을 저장하고 지열을 보존한다. 연중 16~18도를 유지해 겨울에도 온대식물이 자라고 여름에도 한대식물이 자란다. 숨골 덕분에 곶자왈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숲이 됐다.

식물의 분포 관점에서 보면 곶자왈은 작은 한라산이다. 해발고도가 낮지만 고지대 식물이 자란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가시덤불과 덩치 큰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았다. 특이한 점은 나무뿌리가 널빤지처럼 옆으로 뻗어 있고 뿌리가 나무줄기만큼 굵다는 것이다. 토양이 부족한 곶자왈에 사는 나무들은 바위를 의지해서 살아간다. 토양 대신 바위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널빤지 모양으로 변형된 뿌리다. 팔 근육을 닮은 널빤지 모양의 뿌리는 두께가 5㎝나 된다. 사람이 근육을 키우는 것과 같은 원리다. 척박한 땅에 사는 나무들의 생존비법이다.

먼물깍습지에 이를 무렵 돌무더기가 쌓인 언덕이 보인다. 탐방로를 지나오면서 간간이 작은 돌무더기가 보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안내판을 보니 동백동산에서 가장 높은 상돌언덕이다. 용암동굴로 먼저 흘러내린 현무암질 용암이 굳은 뒤 계속 용암이 밀려오면 내부의 압력이 커진다. 이때 얇고 부서지기 쉬운 용암류의 표면은 부풀어 오른 중심부에 의해 마치 빵 껍질처럼 불규칙하게 깨진다. 이를 화산학 용어로 압력돔이라 부른다. 생성 당시에는 큰 바위였던 상돌언덕에 나무들이 자라면서 바위틈으로 뿌리가 뻗어가고 풍화작용을 거치며 주변에 떨어져나간 바위들이 쌓인 형상이다. 상돌언덕 가운데로 돌계단이 나 있다. 과거에는 상돌언덕이 동백동산에 나무를 벌채하러 온 외지인을 감시하는 초소로 사용됐다. 지금은 언덕 주변이 온통 나무와 넝쿨로 숲을 이뤘지만 한때는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 쓰일 만큼 넓은 광장지대였다.

■ 버려진 땅, 기회의 땅

제주의 허파 역할을 하는 곶자왈도 훼손이 심각하다. 이미 많은 면적의 곶자왈 지대가 골프장, 택지개발 사업으로 훼손됐다. 곶자왈 지대 훼손의 가장 큰 원인은 골프장과 관광지 개발 등 대규모 개발이다. 도로 개발·채석장·공장 건설 등 산업용 개발도 곶자왈을 변화시키는 원인이다. 곶자왈 내 관광시설 등으로 이용되는 면적은 전체 곶자왈 면적 중 31.9%를 차지한다. 개발과 함께 숲이 사라지면서 곶자왈에 살던 동식물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 게다가 제주의 생명수인 지하수는 고갈 및 오염 위험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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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태 박사가 공동상임대표로 있는 곶자왈사람들에서는 곶자왈 보존 방안으로 곶자왈 국민신탁운동을 펼치고 있다. 국민신탁운동은 시민들이 마련한 기금으로 곶자왈을 매입해 영구보존하자는 시민운동이다. 곶자왈은 보존을 통해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우리 모두의 자연유산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제주의 중산간엔 수많은 골프장이 있다. 달리 말하면 골프장의 숫자만큼 곶자왈이 사라진 것이다.

몇 주 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린 곶자왈 전문가 워크숍 뒤풀이 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제주도의 곶자왈 전문가와 제주도청 관계자들이 모여 곶자왈 보존에 대해 저마다의 생각을 논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곶자왈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흡사 독일 출신의 위대한 자연학자이자 탐험가인 훔볼트의 후예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훔볼트에 견줄 만큼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제주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문득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누군가 내게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지하철역이 가까워 교통이 편리하다는 대답 외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필자 문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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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과학동아’에서 기자로 일한 과학탐험가다. 지난 10여년간 과학을 주제로 서호주·몽골·알래스카 등 지질학적 명소들을 탐험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NASA 우주생물학그룹과 과학탐사(2010년)를 했고, <효리네 민박>(JTBC), <어쩌다 어른>(tvN), <세계테마기행>(EBS)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35억년 전 세상 그대로>가 있다.


<문경수 과학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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