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 영화 名匠 고바디 감독, 심사위원으로 부산영화제 참석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부산영화제의 고(故)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와도 인연이 깊다. 그는 “부산을 고향집처럼 느끼는 것도 김지석의 덕”이라고 했다. /김종호 기자 |
제목만 보면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2000)은 무척 낭만적인 내용일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란·이라크 국경지대 쿠르드족 마을에 사는 어린 아이들 이야기다.
쿠르드족은 주로 이란·이라크·터키·시리아 등의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4500만명이 흩어져 살아간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없는 민족'이다. 하루종일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 먹고 살려면 군인들의 총격을 감수하고 지뢰밭을 건너며 밀수를 해야 한다. 쿠르드 아이는 생업의 수단인 말이 추위와 등짐의 고통을 견디도록 술을 먹인다.
이 영화를 만든 바흐만 고바디(48) 감독은 이란 국경 마을에서 나고 자란 쿠르드인. 이라크에서도 겨우 30㎞ 떨어진 마을이었다. 자신의 첫 장편이자 최초의 쿠르드어 영화인 이 작품으로 칸영화제 신인감독상인 황금카메라상을 받았고, 대변할 이 없는 쿠르드족의 대변자로 살아왔다. 쿠르드인의 삶과 땅을 영화로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으로 초청돼 새 영화 '나라 없는 국기'를 들고 부산에 왔다. 지난 17일 부산 해운대에서 만난 감독은 "내게 필름과 카메라는 무기"라고 했다. "끊임없이 분쟁과 전쟁이 이어지는 땅에서 왔으니까요. 첫 영화를 찍을 때 삼각대에 카메라를 얹고 '액션!'을 외쳤더니 아이들이 우르르 도망가더군요. 바다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처럼 힘없다 해도 쿠르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어요."
그의 영화엔 늘 뿌리를 잃고 떠도는 사람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릴 적 이웃집에 '시누르'(국경)라는 이름의 소녀가 살았죠. 쿠르드 아이들에겐 전쟁에서 온 이름이 많아요. '아바레'(난민), '민'(지뢰) 같은. '부시' '콘돌리사' 같은 이름도 유행했고, 트럼프 당선 뒤엔 '도널드'도 많아졌어요. 그들이 쿠르드에 자유를 줄 거라고 희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사담 후세인과도 싸웠고,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에도 선봉에 섰지만 주변국들뿐 아니라 미국 등 서방 강대국도 쿠르드 독립에 반대한다. 중동의 불안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쿠르드를 대변하는 그의 영화가 이란 정부에도 골칫거리였다. 감독은 2009년 출국 이후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터키 이스탄불과 미국 뉴욕 등을 떠돌며 영화 작업을 한다. "올해 75세인 제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쿠르드 땅 우리 집 발코니에서 아들인 나와 저녁을 먹는 것입니다."
나라 없는 민족에겐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사소한 행복조차 이루기 힘든 소원이다.
그는 "나는 '영화 제작가'(film maker)가 아니라 '창문 제작가'(window maker)"라고 했다. "젊은 영화인들에게 늘 말하죠. 영화를 만들다 보면 벽에 부딪히지만, 그 벽에 창을 내고 바깥세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감독이라고요."
그는 "영화는 내게 자식과 같다"고도 했다. "열 살 된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미워할 수 없듯 10년 전에 만든 영화에도 부끄러움이 남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 영화는 넷플릭스와 함께 만들 것 같아요. 뉴욕에 사는 쿠르드인들의 사랑 이야기죠."
[부산=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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