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28 (토)

필름과 카메라, 내 민족 위한 무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쿠르드 영화 名匠 고바디 감독, 심사위원으로 부산영화제 참석

조선일보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부산영화제의 고(故)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와도 인연이 깊다. 그는 “부산을 고향집처럼 느끼는 것도 김지석의 덕”이라고 했다. /김종호 기자


제목만 보면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2000)은 무척 낭만적인 내용일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란·이라크 국경지대 쿠르드족 마을에 사는 어린 아이들 이야기다.

쿠르드족은 주로 이란·이라크·터키·시리아 등의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4500만명이 흩어져 살아간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없는 민족'이다. 하루종일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 먹고 살려면 군인들의 총격을 감수하고 지뢰밭을 건너며 밀수를 해야 한다. 쿠르드 아이는 생업의 수단인 말이 추위와 등짐의 고통을 견디도록 술을 먹인다.

이 영화를 만든 바흐만 고바디(48) 감독은 이란 국경 마을에서 나고 자란 쿠르드인. 이라크에서도 겨우 30㎞ 떨어진 마을이었다. 자신의 첫 장편이자 최초의 쿠르드어 영화인 이 작품으로 칸영화제 신인감독상인 황금카메라상을 받았고, 대변할 이 없는 쿠르드족의 대변자로 살아왔다. 쿠르드인의 삶과 땅을 영화로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으로 초청돼 새 영화 '나라 없는 국기'를 들고 부산에 왔다. 지난 17일 부산 해운대에서 만난 감독은 "내게 필름과 카메라는 무기"라고 했다. "끊임없이 분쟁과 전쟁이 이어지는 땅에서 왔으니까요. 첫 영화를 찍을 때 삼각대에 카메라를 얹고 '액션!'을 외쳤더니 아이들이 우르르 도망가더군요. 바다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처럼 힘없다 해도 쿠르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어요."

그의 영화엔 늘 뿌리를 잃고 떠도는 사람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릴 적 이웃집에 '시누르'(국경)라는 이름의 소녀가 살았죠. 쿠르드 아이들에겐 전쟁에서 온 이름이 많아요. '아바레'(난민), '민'(지뢰) 같은. '부시' '콘돌리사' 같은 이름도 유행했고, 트럼프 당선 뒤엔 '도널드'도 많아졌어요. 그들이 쿠르드에 자유를 줄 거라고 희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사담 후세인과도 싸웠고,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에도 선봉에 섰지만 주변국들뿐 아니라 미국 등 서방 강대국도 쿠르드 독립에 반대한다. 중동의 불안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쿠르드를 대변하는 그의 영화가 이란 정부에도 골칫거리였다. 감독은 2009년 출국 이후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터키 이스탄불과 미국 뉴욕 등을 떠돌며 영화 작업을 한다. "올해 75세인 제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쿠르드 땅 우리 집 발코니에서 아들인 나와 저녁을 먹는 것입니다."

나라 없는 민족에겐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사소한 행복조차 이루기 힘든 소원이다.

그는 "나는 '영화 제작가'(film maker)가 아니라 '창문 제작가'(window maker)"라고 했다. "젊은 영화인들에게 늘 말하죠. 영화를 만들다 보면 벽에 부딪히지만, 그 벽에 창을 내고 바깥세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감독이라고요."

그는 "영화는 내게 자식과 같다"고도 했다. "열 살 된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미워할 수 없듯 10년 전에 만든 영화에도 부끄러움이 남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 영화는 넷플릭스와 함께 만들 것 같아요. 뉴욕에 사는 쿠르드인들의 사랑 이야기죠."





[부산=이태훈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