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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젓가락질 해보라, 소금물 농도 맞혀라 … 깜깜이 면접에 진땀 빼는 취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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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직무 능력 평가 필요

일회성 이벤트 치우쳐 혼란 가중

요구되는 역량 사전에 공개해야

"스펙 안 보니 실력으로 경쟁"

학력·학점 때문에 매번 서류 탈락

명문대생 아니지만 면접 자신감

"열심히 공부 했는데 역차별"

남들보다 더 노력해서 이룬 성과

평가에 반영조차 할 수 없다니 …

하반기 취업 시장 블라인드 채용 열풍의 빛과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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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과 협동심을 평가하는 요리면접. [사진 각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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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준비생 차지형(27)씨는 올 하반기 총 30여 개 기업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 연달아 취업 시장에서 고배를 마신 탓에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공고가 뜬 모든 기업에 지원했다.

차씨는 이번 하반기 공채엔 자신감이 생겼다. 대부분의 기업이 블라인드 방식으로 채용을 진행하는 덕분에 학력·학점 콤플렉스가 해소됐기 때문이다. 차씨는 “명문대생도 아니고 학점도 평균 이하라는 점 때문에 매번 서류에서 탈락해 왔는데 블라인드 채용으로 자신감이 붙었다. 수차례 인턴을 거치며 실무 경험을 많이 쌓은 만큼 면접까지 올라간다면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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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과 향에 대한 민감도를 알아보는 ‘관능평가’. [사진 각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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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취업준비생 김주형(25)씨는 차씨와 달리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불만이 가득 쌓인 상태다. 입사지원서에 출신 학교와 학점 기재란이 없어지면서 대학 시절 열심히 학점을 관리해 온 노력이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고등학교 시절 죽기살기로 공부해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입학했고, 대학생이 된 뒤에도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는데 블라인드 방식 채용에서는 이런 성적이 무용지물이 됐다”며 “남들보다 내가 더 노력해 이룬 성과들인데 평가에 반영조차 할 수 없는 건 오히려 역차별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올 하반기 채용 시장의 핵심 키워드는 ‘탈스펙’이다. 학점·자격증·인턴 경력으로 대표되는 스펙 경쟁에서 이겨야 취업 문턱을 넘을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는 이 같은 스펙들을 자기소개서에 기재조차 할 수 없는 블라인드 채용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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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자체 설문조사/구글 온라인 설문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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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지난 6월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였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똑같은 출발선 위에서 오로지 실력으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블라인드 채용제를 실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후 332개 공공기관과 149개 지방공기업이 일제히 블라인드 방식으로 하반기 채용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흐름은 유통·IT·금융권을 시작으로 민간기업에도 퍼졌다.

특히 블라인드 채용 도입으로 학력과 자격증을 까다롭게 따지기로 유명한 은행과 카드사 등 금융권의 채용 방식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신한카드는 성별·나이·학교·학점·자격증 등 스펙을 100% 배제한 ‘디지털 패스’ 전형을 이번에 처음 도입했다. 서류전형 없이 ‘디지털과 카드’라는 주제를 놓고 5분간 자신만의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담긴 내용을 발표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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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도시락 메뉴를 직접 기획하는 도시락 면접. [사진 각 기업]


소셜커머스업체 티켓몬스터는 스펙 대신 직무 역량 중심으로 평가하기 위해 ‘서드아이(Third Eye) 면접’을 실시한다. 직책·직급에 상관없이 지원자들을 가장 잘 평가할 만한 실무 직원들로 평가위원단을 구성한다. 기존 딱딱한 분위기의 임원면접이나 압박면접 등을 대체해 직무능력 하나만을 제대로 평가하겠다는 취지다.

일부 기업에선 출신 학교나 학점 등 스펙에 의존한 인재 채용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색 전형을 도입했다. 롯데그룹의 ‘스펙태클 오디션’이 대표적이다. 취업 준비생들이 경쟁적으로 시간을 투자하는 스펙 쌓는 문화에 태클을 건다는 의미로, 직무에 대한 기획서나 제안서, 미션 수행 등을 통해 최종 합격자를 가리는 방식이다. 실제 롯데그룹 편의점 계열사인 세븐일레븐은 1인가구 증가와 함께 일반화된 ‘편의점 도시락’에 대한 관심도와 창의성을 평가하기 위해 ‘도시락 메뉴 기획’ 면접을 진행했다.

식품기업 샘표는 ‘한국 식문화의 계승’이라는 기업 철학에 맞춰 서류 전형과 인·적성 검사를 통과한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이색 면접을 진행한다. 요리면접과 젓가락면접이 대표적인 사례다. 요리면접은 지원자 4~5명이 한 팀을 구성해 음식을 만드는 전체 과정을 심사하는 방식이다. 메뉴를 선택하고 합을 맞춰 요리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인성과 팀워크, 리더십 등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회사의 설명이다. 젓가락 면접은 회사 철학에 대한 지원자들의 이해와 면접 태도를 평가하기 위해 도입한 전형이다.

지원자들의 미각·후각을 평가해 점수를 매기는 기업도 있다. 파리바게뜨·던킨도너츠 등의 식음료 프랜차이즈를 운영하고 있는 SPC그룹은 지원 부서에 관계없이 모든 지원자에게 ‘관능 평가’를 실시한다. 5단계로 구분된 소금물의 농도를 알아맞히게 하거나 제시된 샘플과 동일한 맛을 내는 향을 맞히도록 문제를 내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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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학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캐릭터 티셔츠를 입고 진행되는 면접. [사진 각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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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선 블라인드 채용이 ‘직무 능력 위주의 공정한 경쟁’으로 자리잡기 위해선 기업들의 평가시스템이 전반적으로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색 채용 대부분이 원활한 직무 능력 평가보단 일회성 이벤트 식으로 진행되는 탓에 취업준비생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공공기관 채용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소고’ 보고서를 통해 “현재 공공기관이 확보한 역량은 블라인드 채용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않다”며 “전문 인력 중심으로 조직화해 인사관리 역량을 강화하고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이 전문적인 채용 역량을 갖추지 못한다면 ‘형식적인 평등’에만 그칠 뿐 블라인드 채용의 본래 취지가 퇴색될 것이란 의미다. 인사·채용 전문가인 강순희 경기대 직업학과 교수는 “블라인드 채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집할 때 채용할 분야에서 요구되는 역량을 사전에 구체적으로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껏 기업이 학벌 중심으로 인재를 뽑아 교육을 통해 필요한 분야에 배치했다면 앞으로는 채용 단계부터 직무 중심으로 신입사원을 선발해 전문화시키는 인재 채용 방식을 갖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블라인드 채용의 부작용으로 청탁이나 외부의 입김에 의한 부정 채용이 늘어날 거란 우려도 나온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스펙 위주 채용 방식은 분명 문제 있지만 지원자 순위를 명확하게 매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며 “블라인드 채용은 주관적 평가가 개입될 여지가 많아진 만큼 외부 민원이나 고위 관계자 입김에 따라 순위가 뒤바뀔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블라인드 채용 1순위 덕목은 첫인상·외모”
취준생 300명에게 물어보니

공정한 실력 위주 평가 61% 찬성

기업들 이색 면접엔 62%가 반대

중앙일보는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 학생과 취업준비생 300명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채용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블라인드 채용 자체에 대해선 찬성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응답자의 61%(183명)가 ‘공정한 경쟁’과 ‘실력 위주의 평가’를 이유로 찬성한다고 답했고, 반대 의견은 39%(108명)에 그쳤다.

블라인드 채용의 도입으로 취업에 필요한 주요 덕목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도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들은 블라인드 채용 전에는 출신 학교(47%), 첫인상과 외모(29%), 학점·자격증 등 각종 스펙(11%) 등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답했다. 하지만 블라인드 채용을 전제로 했을 때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첫인상과 외모(61%), 창의성(11%), 실무 능력(8%) 등을 꼽았다.

블라인드 채용에 반대하는 이유로는 “각종 스펙 경쟁을 유도하는 분위기에 맞춰 취업을 준비한 학생이 불이익을 받게 된다” 등의 의견이 있었다.

블라인드 채용이 도입되면서 각 기업에 확산하고 있는 ‘이색 면접’에 대해선 부정적인 의견이 더 많았다. 응답자의 62%(186명)가 기업들이 각종 이색 면접을 도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고 답했고, 38%(114명)만이 찬성한다고 답했다.

취업준비생 사이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출신 학교와 학점까지도 블라인드 처리를 해야 하는지였다. 블라인드 채용에 찬성한다고 답한 응답자 183명 중 87명은 출신학교·학점을 가려야 한다고 답했고, 나머지 96명은 블라인드 채용이라 해도 출신학교·학점은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출신학교·학점을 드러내야 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대학 입학과 학점은 개인이 노력으로 일궈낸 성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에 반대하는 쪽에선 출신학교와 학점은 직무 능력과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학연 등의 이유로 불필요한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진우 기자 di 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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