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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다 해준다는 정부·증세 싫다는 시민…재정파탄 공범될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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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부르는 시민실패 / 文정부 여론정치의 함정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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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재정부 예산당국 관계자는 최근 추가경정예산 편성 때 고민에 빠졌다. 부처에서 예산 사업을 증원해달라며 수많은 사업 리스트를 전달해왔는데, 국가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기보다는 특정 단체의 논리를 고스란히 전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선 부처 차원에서 걸러져야 할 요구들이 예산실로 접수되면서 '악역'을 도맡아야 해 매우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며 "일선 부처들이 각종 이익단체의 대변자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다른 부처도 고민이 크긴 마찬가지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최근 들어 각종 지원을 문의하거나 요구하는 이익집단이 크게 늘고 있다"며 "업무시간 중 전화 응대에 바빠 은행처럼 퇴근시간 이후에야 정책 업무를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문재인정부가 지난 박근혜정부를 '시장실패'로 규정하며 노동·복지 분야와 관련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강조하는 가운데, 이 같은 행보가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또 다른 정부·시장실패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양극화,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정부 개입의 당위성이 높아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와 '시장'을 이분법적인 구도로 놓고, 시민을 앞세워 시장실패를 교정한다는 명분으로 정부가 무분별하게 몸집을 불리거나 특정 세력 편만을 든다면 심각한 국가실패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일련의 노동정책은 이 같은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지난 4개월 동안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등을 급격하게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내년도 최저임금은 올해 대비 16.4% 인상된 7530원으로 올랐고, 올해에만 수만 명에 달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울러 이달 중으론 민간부문 비정규직을 제한하는 방안에 대한 발표가 있을 것으로 보여 그 어느 때보다도 노동 분야에 대한 정부 개입이 커지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도 마찬가지다. 근로시간이 주당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되면 휴일근로가 '휴일 및 연장근로'가 되면서 중복 할증이 적용돼 기업이 시간당 임금을 두 배로 지급해야 한다.

이에 대해 정부 고위 관계자는 "그동안 보수정권 9년 동안 친기업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판단"이라며 "큰 방향이 바뀌다 보니 심해 보이는 측면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정책기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보수정권의 친(親)기업 행보를 '시장실패'로 단정 짓고 정부 개입의 근거를 찾을 뿐, 정작 '정부가 개입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인가'에 대한 검토와 고민이 빠졌다고 지적한다. 이두원 연세대 교수는 "중장기 로드맵이 없이 너무 정부 재정 투입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며 "이런 형태의 정부 개입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이 같은 정책 결정들이 정부와 국회에서의 심도 있는 숙의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대선 공약을 지렛대로 삼아 여론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데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문재인정부에서 국민과의 소통이 늘었다고 하지만 심도 있는 토론과 숙의가 아닌 피상적인 수준에서의 논의만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여론정치'는 정치 난맥상을 돌파하는 데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동력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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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정부'에 따라 급증하는 재정 부담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부족하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연일 팽창하는 문재인표 복지가 대표적이다. 아동수당 신설, 기초연금 인상 등이 잇따르며 역대 최대 규모인 내년 정부 예산안 429조원에서 복지 등에 의한 의무지출 비중이 사상 처음으로 절반을 넘었다. 당초 국가재정 추계에 따르면 국가채무는 2012년 443조1000억원에서 2020년 793조5000억원으로 늘어날 것이라 전망했는데 향후 높은 복지지출, 고령화가 맞물려 채무 증가 속도는 더욱 가팔라질 전망이다.

김홍균 서강대 교수는 "재정건전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낫다는 논리로 최근 국가재정을 풀고 있는데, 선진국의 고령화 시점을 비교해보면 당시 OECD 국가들은 부채가 우리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됐다"면서 "고령화로 인해 의무지출이 늘면 재정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때문에 '시장실패'나 '정부실패'라는 고정관념을 넘어 '정부혁신'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정희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부 개입은 필요하되 시장 효율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정홍 기자 / 이승윤 기자 / 나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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