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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바이오 금맥` 유전자시장…한국만 낙오시키는 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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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더뉴스 / 생명윤리법에 막힌 불치병 치료 연구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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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차병원 줄기세포연구소는 성인 체세포를 복제한 배아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보다 앞선 2013년 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가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했지만 태아 세포를 활용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태아 세포에 있는 핵은 분화 능력이 좋아 줄기세포를 만들기에 용이하다. 성인 세포를 이용한 복제 배아줄기세포는 한국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이룬 쾌거였다. 이후 차병원은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해 노인성 황반변성 질환에 대한 임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배아줄기세포 복제 연구는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진행됐다. 규제 때문이다. 국내 생명윤리법은 냉동 보관된 난자만 연구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냉동 난자를 이용해 배아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한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단 한 건도 없다. 신선한 난자를 사용해도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연구진은 짐을 꾸려야만 했다.

지난 8월 3일, 기초과학연구원(IBS)과 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 공동 연구진은 돌연사의 원인으로 꼽히는 '비후성 심근증'을 초래하는 유전자 변이를 인간 배아에서 교정해 정상 유전자로 복구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전에도 중국 연구진이 유전자 가위를 활용해 인간 배아 유전자 교정을 시도한 사례가 있었지만 DNA가 교정된 세포와 그렇지 않은 세포가 섞이는 '모자이크 현상'이 나타났다는 한계가 있었다. 연구진은 모자이크 현상을 제어함으로써 1만개가 넘는 유전 질환의 대물림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연구의 핵심인 인간 배아 교정은 미국에서 진행됐다. 생명윤리법상 국내에서 인간 배아의 유전자를 교정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줄기세포와 유전자 가위는 미래 의료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핵심 기술로 꼽힌다. 맞춤형 진료는 물론 불치병으로 알려진 여러 질환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각종 규제로 연구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가능한 연구만 나열한 뒤 이외의 것은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포지티브 방식'의 규제가 기술개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자칫하다간 미래 의료 시장에 필요한 원천기술까지 선진국에 빼앗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줄기세포는 인체가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무릎 연골이 상했다면 줄기세포를 연골로 분화시켜 무릎에 넣어 치료할 수 있다. 뇌세포는 물론 심장세포도 만들 수 있어 환자 맞춤형 세포·조직·장기를 만들 수 있다.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기 위해서는 성인의 체세포를 난자에 이식한 뒤 융합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난자는 배아줄기세포의 필수 요소로 꼽히는데 한국에서는 생명윤리법상 불임 치료에 사용된 후 남은 동결 난자만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비동결 난자는 미성숙하거나 비정상적인 상태일 때만 사용 가능하다. 한 번 얼었다 녹은 난자는 미세구조에 변화가 생기는 만큼 연구에 사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다.

차병원 이동률 교수는 "동결 난자는 연구에 활용할 수 없는 만큼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난자 사용과 관련한 윤리적 문제는 공감하지만 적법한 절차를 따라 비동결 난자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생명윤리법으로 인해 연구가 한계에 다다른 분야가 바로 유전자 가위다. 유전자 가위는 생명의 기본이 되는 단위인 'DNA'를 교정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2012년 3세대 유전자 가위인 '크리스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생명공학계에서는 이를 혁명이라고 불렀다. 1·2세대 유전자 가위와 비교했을 때 간편하게 유전자 교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불과 4년 만에 생산량을 늘린 농산물이나 영화 '옥자'에서처럼 근육량을 늘린 돼지 등이 개발됐다. '유전자 골드러시'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전 세계 많은 대학, 연구소, 제약기업 등이 앞다퉈 유전자 가위에 대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유전자 가위를 이용하면 이론적으로 선천성 장애나 유전에 의한 질병 예방이 가능하다. 기형이나 유전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서 미리 잘라내면 되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도 이미 완성 단계에 와 있다. 문제는 인간을 대상으로 효과를 확인하거나 임상을 할 수 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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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생명윤리법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생명윤리법 47조(유전자 치료 및 연구) 1항에 따르면 "유전 질환, 암, 후천성면역결핍증, 그 밖에 생명을 위협하거나 심각한 장애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질병의 치료를 위한 연구"와 "현재 이용 가능한 치료법이 없거나 유전자 치료의 효과가 다른 치료법과 비교하여 현저히 우수할 것으로 예측되는 치료를 위한 연구" 모두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인체 내에서 유전적 변이를 일으키는 일련의 행위에 해당하는 유전자 치료 연구를 할 수 있다. 유전물질이나 유전물질이 도입된 세포를 인체로 전달하는 행위와 관련해서는 위의 두 경우 중 하나만 해당해도 가능하다.

문제는 1항부터 발생한다. 이미 치료제가 존재하면 유전자 가위라는 신기술을 이용해 같은 질병에 대한 연구를 하기 어렵다. '현재 이용 가능한 치료법이 없거나'라는 조항에 위배된다.

인간 배아 연구도 마찬가지다. 생명윤리법에서는 연구 목적으로 인간 배아를 생성하는 것은 물론 배아의 유전자 치료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이 앞다퉈 기초 연구를 목적으로 한 배아 연구를 허용한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은 이 같은 규제 때문에 유전자 가위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미국에서 연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김진수 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은 "국내에서 연간 수만 건의 시험관아기 시술이 이뤄지는데 인공수정 클리닉에서도 배아의 유전자를 교정하는 시술을 할 수 있다"며 "규제가 심하면 유전병을 앓는 부모들이 중국으로 가서 시술하는 등 불법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강력한 규제가 또 다른 불법을 일으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진수 단장은 "연구는 허용하고 안정성이 100% 확보될 때까지 임상은 규제하는 방안으로 법을 탄력적으로 운용해야 우리 기술이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동률 교수도 "생명과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기존 방식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윤리적·과학적인 부분을 고려한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며 "무조건 안 된다는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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