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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강동궁 “당구, 두 번 때려치우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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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수원시 한 당구클럽. 한 남자가 테이블이 찢어질 듯 강한 샷을 날렸다. ‘쾅’ 하는 소리에 당구장의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샷을 바라보는 이 남자의 인상이 강렬하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집중하는 눈매가 매섭다. 큐를 내려놓고 숨을 고르던 그가 기자를 바라봤다. 이내 박력 넘치던 위압감이 해제됐다. 그리고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며 방긋 웃어보였다. 기자를 긴장하게 만든 이 남자는 한국 당구계의 ‘헐크’ 강동궁(동양기계‧3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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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인상으로 유명한 "헐크" 강동궁이 국내 언론사 최초로 MK빌리어드뉴스를 위해 취해준 귀여운 설정 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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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를 내려놓은 헐크의 인상은 서글서글했다.

“제가 강해보인다고요? 물론 시합때는 강해보이고 싶죠. 헐크라는 별명도 마음에 쏙 들어요. 스포츠선수가 캐릭터가 있다는 건 좋은 거죠. 하지만 저는 강함과 순수함이 공존하는 사람입니다. 제 경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힘 넘치는 스트로크뿐만 아니라 섬세한 샷들도 많아요. 실제 성격도 별명과는 조금 다릅니다. 장난치기 좋아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어색해 하는 ‘개구쟁이’입니다. 하하.”

그의 캐릭터가 언제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아마 200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해요. 제 강한 인상과 스트로크가 헐크라는 캐릭터와 잘 맞았나 봐요. 제 이름 앞에 ‘헐크’라는 수식어가 따라오기 시작했어요. 그 별명을 의식하기도 합니다. 강해보이고 싶은 마음은 어릴 때의 경험들이 큰 이유인 것 같아요. 학생 때 선수로 등록했는데, 어린 마음에 ‘혹시 상대가 나를 얕잡아 보진 않을까’란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강동궁은 고 김경률, 조재호 등 또래 선수들보다 조금 이른 1994년 중2때 선수가 됐다. 이후 ‘신동’과 ‘천재’를 거쳐 국내 탑 랭커로 승승장구 했다. 2013년엔 구리 월드컵 우승컵을 들며 한국인 세 번째 월드컵 챔피언도 됐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소위 ‘엘리트코스’를 밟은 강동궁. 마냥 탄탄대로만 걸었을 것 같은 그는 의외의 고백을 했다.

“사실 22살, 30살 때 진지하게 당구선수를 때려치우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최후통첩’ “1년 안에 성과를 내라”

2002년 전역한 강동궁은 그해 10월 아버지와 마주앉았다. 깊은 한숨과 함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 “앞으로 1년만 밀어줄 테니 그 안에 성과가 없으면 그만두어라.”

아버지는 그의 제1호 팬이자 든든한 응원군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당구선수를 그만두라는 조건부 ‘최후통첩’을 날린 것이다.

“정말 섭섭했어요. 순간 무릎에 힘이 다 풀리더라고요. 혼자 방에 들어가 아버지 말씀을 곱씹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만두자, 그만두자... 내가 왜 당구를 치고 있나’ 이런 생각이 계속됐죠. 서운함이 쌓이다가 나중엔 오기가 생겼어요. 보기 좋게 해내고 싶었습니다.”

이후 강동궁은 이를 악물었다.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던 강동궁은 7개월 뒤 기회를 포착했다. 2003년 5월, ‘SBS 당구대제전 1차시합’이 열린 것.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대회에 참가했어요. 그랬더니 신기하게 성적이 따라왔어요. 256강부터 시작해 8강까지 거침없이 치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8강전부터 TV중계가 된다는 거예요. 당연히 긴장됐죠.”

덜덜 떨며 8강전 뱅킹을 실시한 강동궁은 생애 최악의 뱅킹을 한다. 힘이 부족했는지 뱅킹한 볼이 테이블 중간에 멈춰버렸다.

하지만 강동궁은 곧 정신을 차리고 경기를 압도했다. 당대 톱랭커로 분류되던 신대권을 맞아 세트스코어 3:1로 압승했다. 그 기세를 몰아 결승까지 오른 그는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이승진마저 꺾는다.

“승진 형님(이승진 선수)은 제가 20대 초반 꽃피울 때 결승전에서 자주 붙었던 상대에요. 그 첫 시작이 SBS 당구최강전 1차대회 결승입니다. 제가 한참 부족했지만, 운 좋게 볼의 배치가 연달아 좋게 뜨면서 승진 형님을 이겼습니다. 큰 규모의 대회, 그것도 TV 중계되는 대회 우승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많은 대회 결승에서 승진 형님을 이겼습니다. 그 형님 덕분에 제가 많이 웃었죠. 하하.”

우승 후 강동궁은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아들을 믿어주세요. 국내 최고의 선수가 되겠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던 강동궁은 “지금은 당시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20대 초반, 사회인으로서 책임감고 갖고 살아야 할 시기에 아들의 성적이 신통치 않으니 당연히 걱정이 되셨겠죠. 그땐 전국대회 성적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16강 언저리에서 항상 탈락하던 때였죠. 당시엔 정말 서운했지만, 저라도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습니다.”

이어 강동궁은 SBB 당구최강전 우승의 원동력을 두 가지로 꼽았다. 선수생활 연장에 대한 갈급함(몹시 조급함), 그리고 그의 전매특허인 ‘파워당구’의 완성 시기가 겹쳐 좋은 결과를 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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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궁이 매서운 눈매를 한 채 자신의 전매특허 "파워당구" 샷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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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매특허 ‘파워당구’, 그 시작은 2001년

강동궁은 고교 때부터 어깨 근력이 남달랐다. 체력장 때 공던지기 1등은 항상 그의 차지였다. 하지만 그는 당시 파워당구를 즐기지 않았다.

“정석대로 평범하게 쳤어요. 그땐 강한 스트로크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고3때 전국대회 준우승도 한 차례 했거든요. 대회명은 기억이 흐리지만, 장소는 또렷하게 기억나요. 수원 코스모스 당구장이었습니다.”

그러던 강동궁이 파워당구에 눈을 뜬 건 2001년, 한 대회에서 김영섭 선수를 만나고 부터다.

“경남쪽에서 선수생활 할 때였습니다. 김영섭 선수는 187cm의 장신이었는데, 제 눈길을 끈 건 큰 키보다 그 선수의 스트로크였습니다. 밀어치기 등을 시원시원하게 날려댔는데, 정확도도 꽤 높았습니다.”

고교 때까지 ‘천재’ 소리를 들었던 강동궁은 이후 주춤한 상태였다. 영남권대회 등 권역별 대회는 꾸준히 우승했지만, 전국대회는 수년간 16강 언저리만 맴돌았다. 정석적인 플레이에서 한 단계 진화해야 할 시기가 왔음을 깨달아가던 때였다. 그런 그에게 김영섭의 스트로크가 눈에 쏙 들어왔다.

곧바로 연구에 들어갔다. 강동궁은 강한 샷에 더해 세밀함까지 갖춘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터키의 예술구 아저씨’로 유명세를 떨치던 세미 세이기너의 영상도 챙겨봤다.

“3년간 스트로크 훈련을 처음 한다는 자세로 정말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제 타고난 어깨와 팔 힘을 극대화 시키려고 근력 강화에도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제 당구 스타일은 그 기간에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2003년 SBS 당구최강자전에서 보상을 받았죠.”

▲“나를 발전시킨 원동력은 승부욕과 탐구욕”

강동궁은 이처럼 당구에 대한 탐구심이 강하다. 이는 남에게 지기 싫은 승부욕 때문이다.

강동궁은 10살 때 처음 큐를 잡았다. 부산에 살던 시절 그의 아버지가 당구장을 열면서부터다. 당구장에 마련된 한 방에서 부모님, 3형제가 함께 살았다. 그래서 학창시절 그의 놀이터는 당구장이 됐다. 특이한 점은 손님 대부분이 3쿠션을 선호했다는 것.

“4구 200점 채우자마자 3쿠션으로 넘어왔어요. 아버지가 운영하던 당구장은 단골손님 위주였는데 전부 3쿠션만 치더라고요. 당시 아버지가 대대 32점 치셨는데, 손님들도 그에 준하는 실력자들이었죠. 그런 분들과 종종 게임을 했는데, 이제 4구에서 3쿠션으로 넘어온 꼬마가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때부터 맹연습에 돌입했죠.”

강동궁은 그렇게 당구에 푹 빠졌다. 중학교 땐 하교하자마자 가방을 놓고 바로 테이블로 향했다. “계산한 각도로 공이 구르고 맞는 게 그저 신기했어요. 스승은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강해 누구에게 물어본다는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대신 단골손님들의 샷을 눈에 담아 그대로 쳐봤어요. 그러다보니 실력이 눈에 띄게 늘더라고요. 나중엔 중학생이었던 제가 단골 아저씨들을 이기기도 했어요.”

학창시절 강동궁은 무언가에 얽매인 삶이 실었다. 본인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 대상은 당구였다. 15세 당구소년의 등장은 당시로선 신선한 일이었다. 게다가 고1이던 1996년엔 전국규모급 대회 우승도 맛봤다.

“당시 결승전 상대는 박승희 선배님셨어요. 고 이상천 선배님과 견주는 실력자였습니다. 그런 분을 고등학생이 이기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습니다. 그때부터 저를 ‘신동’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부담은 없었어요.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이 즐거웠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선택한 진로에 대한 답이 빨리 나온 것 같았기 때문이죠.”

당시를 추억하던 강동궁은 본인과 함께 학생신분이던 한 선수를 기억했다. 바로 ‘포켓볼 여제’ 김가영이다. 삼촌 혹은 큰아버지뻘 되는 선수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둘이 나이 많은 상대 선수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더 악착같이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그렇고 가영이도 기가 세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웃음)

이어 강동궁은 조명우를 거론했다.

“명우(조명우 선수)는 제가 당구선수를 시작할 때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공을 치고 있어요. 그리고 냉정히 평가하면 명우 나이 때 제 실력보다 지금의 명우가 훨씬 뛰어납니다. 당시에 저는 국외대회는 선망의 대상일 뿐이었는데, 지금 명우는 월드컵 우승권에도 진입하는 등 선전하고 있잖아요. 그 길을 일찍 걸어온 선배로서, 또 형으로서 기특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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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어치기 시범을 보이고 있는 강동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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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강동궁, 한국 3쿠션 ‘큰 축’ 되다

그의 현재 정착지는 수원이다. 5년 전쯤 자리를 잡았다. 20대에는 부산에서 살다 마산 창원에서 주로 선수생활을 했다. 그러다 서울시청에 스카우트 돼 수원으로 들어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국 3쿠션계의 큰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영광도 안았다. 10년 가까이 태극마크를 달고 아시안게임, 대륙별 선수권대회 등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강동궁은 당시 기억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남들은 태극마크 달면 평생의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 당구선수들의 사정은 조금 달랐어요. 다른 종목 선수들은 20대 초중반, 어리면 10대도 국가대표로 뽑혔는데, 저희들은 대부분 30줄에 가까운 혹은 서른을 넘긴 집안의 가장들이었죠. 국가대표팀 훈련에 들어가면 한 달 30~40만원의 훈련비가 고작이었어요. 몇 달간의 합숙기간이 오히려 저희에게는 독이 된 것이었죠.”

▲김정규 코치와 ‘최악의 2010년’을 극복하다

여러 일들로 힘든 국가대표 시절이었지만, 그때 얻은 큰 소득도 있다. 바로 당시 당구대표팀 코치였던 김정규(김정규당구스쿨 원장)씨를 만난 것.

“코치와 선수로 만났지만, 그 이상의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분이에요. 제 정신적인 멘토죠. 제가 2010년 전후로 극심한 슬럼프가 왔을 때 곁에서 제게 많은 조언을 해주셨어요.”

2010년 전후로 강동궁은 제2차 진화를 시도했다. 파워 넘치는 샷, 예술구에 가까웠던 자신의 샷들이 또 한 번 한계에 봉착했음을 실감했다.

“국내대회에서는 제 스타일이 먹혔는데, 국제대회에 나가면 통하지 않더라고요. 잘 치는 선수들을 보면 두께와 임팩트만으로 게임을 쉽게 푸는 겁니다. 공을 툭툭 치는게 다 득점이 됐어요. 반면 저는 공을 너무 어렵게 치고 있고 있더라고요. 이런 일이 계속되니 자존심이 상했죠. 제 스타일이 싫어졌어요, 그러다보니 게임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또 한번의 변화가 절실했습니다.

과감하게 스타일 변화를 모색했지만, 20년 가까이 터득한 스트로크를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샷 컨디션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생애 최악의 슬럼프가 와버렸다.

“이것저것 다 해보니 예전 제 폼도 잃고, 그렇다고 정석대로 좋은 폼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됐습니다. 옛날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기억조차 없어졌어요. 저는 이도저도 아닌 걸 싫어합니다. 하려면 최고가 돼야죠. 하지만 이렇게 가다간 최고는커녕 그 근처도 못가고 선수생활을 접을 것 같더라고요.”

강동궁은 아예 큐를 놓을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포기’라는 단어를 혐오하던 그였지만, 그때는 그 단어가 머릿속에 수도 없이 떠올랐다.

“그 상태가 1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잘 하고자 하는 의욕은 넘치는데, 그 방법을 모르겠으니 복장이 터졌죠. 이러다 미쳐버리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때 김정규 코치에게 도움을 구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샷 할 때 팔의 각도가 적게 벌어지고, 전체적으로 힘이 너무 들어가는 것 같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강동궁은 그동안 계속 상박과 하박의 각도를 좁게 한 상태로 공을 쳐왔다. 세이기너를 보며 따라했던 영향이다. 또 힘과 회전에만 정신이 팔려 손목 스냅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어깨 힘으로만 샷을 날렸다. 손목 스냅이 들어가야 적은 힘으로 더욱 정확하게 공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다시금 깨달았다.

김정규 코치와 강동궁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선발전을 치르는 기간 동안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서 샷에 대한 세밀한 부분을 조금씩 수정해갔다.

강동궁은 그동안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해본 적 없다. 어릴 적부터 최고였고, 혼자 돌파구를 찾아 국내 톱 랭커까지 올라온 그였다. 그러던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의지했다.

“김정규 코치님은 기술적인 부분과 함께 심리적으로도 큰 힘이 돼주셨어요. 그 덕분에 당구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죠. 아마 그때 코치님을 만나지 않고, 다른 길이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미련없이 큐를 내려놓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당구는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고, 계속 공부해야 한다는 걸 또 한번 깨닫게 됐죠. 겸손함도 커졌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렇게 헐크는 제2차 진화를 마쳤다. 교정된 폼으로 강력함과 섬세함이 더욱 배가됐다. 그리고 큐 컨디션이 하늘을 찌르던 헐크는 ‘운명의 2013년’을 맞는다. 그 해 9월, 구리에서 세계 3쿠션 월드컵이 개막했다.

<2회에 계속>

[MK빌리어드뉴스 이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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