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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우리 역사에 깃든 ‘중국 열등의식’ 극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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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중국지’ 재개정판 펴낸 현이섭 이사

한겨레

현이섭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는 마오쩌둥의 공과를 묻는 기자에게 “공과 과를 5대5 정도로 보는게 좋겠다”고 했다. “마오쩌둥은 건국 이후 폭군적 면모를 보이며 전횡하지만, 오늘날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흥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인물입니다.” 저우언라이에 대해 묻자 덩샤오핑이 한 말로 대신했다. ‘저우 없는 마오 없고, 마오 없는 저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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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이섭(68)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는 5년 전 중국 사회주의혁명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책 <중국지>를 상·하 두권으로 펴냈다. 1100쪽이 넘는 이 책은 출간 3개월 만에 3쇄를 찍었다. 대기업이나 은행 쪽에서 사원교육용으로 대량 구매하기도 했다. 지금 중국을 이끄는 권력집단의 선배 세대 이야기에 중국 진출 기업들이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이 책의 재개정판이 최근 인물과사상사에서 나왔다. 2권을 3권으로 나누고 부제(마오쩌둥과 중국혁명 평석)를 새로 달았다. 현 이사를 지난 21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부제에 마오쩌둥(1893~1976)이 들어간 것은 출판사 요청 때문이었다. “저는 마오쩌둥 부제를 다는 것에 부정적이었어요. 지금도 중국에서 마오쩌둥은 금기어입니다. 지금의 중국을 만든 인물이지만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거든요.”

그는 지난 2월 <민중의 소리> 평생교육원 이산아카데미에서 책 내용을 토대로 모두 32시간 분량의 강의를 했다. 이 강의는 50회 분량 동영상으로 제작돼 이달 말께 유료서비스 될 예정이다. “강의에 중국 쪽 사업을 하는 분들이 많이 오셨어요. 중국 공산당 1세대 이야기를 해주면 중국인들이 친밀감을 느낍니다.”

중국 공산당 자료 바탕 ‘혁명과정 기록’
초판 호평 5년만에 ‘3권짜리’로 증보
기업들 교육용 관심…강의 영상도 유로 서비스


초등생 때부터 ‘중국 4대 기서’ 탐독
80년대 해직기자 시절엔 중국어 ‘열공’
“인재 내쫓는 언론현실 중국과 비슷”


책은 중국 공산당의 공식 자료를 토대로 마오쩌둥의 어린 날부터 시작해 장칭 등 4인방이 몰락하는 1976년까지를 다룬다. 장정이나 국공내전, 문화대혁명과 같은 중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들이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토대로 조금씩 진상을 드러낸다. 민중 혹은 권력에 다가가기 위해 마오쩌둥과 그 주변 인물들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방어했는지를 사료를 근거로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재개정판에서는 ‘패자’ 장제스 부분을 일부 보완했다. “책이 나온 뒤 장제스에 대한 궁금증을 문의하는 독자가 많았어요. 쑨원의 유력한 조수에 불과했던 그가 기라성 같은 선배를 제치고 정권을 잡는 과정이 범상치 않아요. 쑨원이 죽자 제일 먼저 그를 국부라고 부른 이가 바로 장제스입니다.”

<중국지>는 공산당의 원전 자료를 토대로 쓰였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는다. 현 이사는 2010년 중국 하얼빈의 <흑룡강신문>에서 10개월 동안 상임고문으로 일하면서 중국 매체를 숙독했다. 이게 집필의 계기였다. “당시 중국 공산당 90돌을 앞두고 <인민일보> 등 중국 매체에서 공산당 비밀해제 문건이 쏟아졌어요. 흥미롭게 지켜보다 귀국해 모두 출력하니, 1만장이 넘더군요.”

집권당 승인을 거친 자료이니 모두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도 동의했다. “제 책이 다 옳다고 할 수 없어요. 큰 사건에 대해 공산당이 자기들 위주의 자료를 많이 내놓았죠. 검증의 한계도 많이 느꼈어요.” 마오쩌둥의 후계자에서 역적으로 한순간 운명이 뒤바뀐 린뱌오가 한 예이다. “린뱌오의 쿠데타 모의 과정 자료 중 일부는 믿음이 안 가고 허술한 데가 많아요. 이 자료들을 냉큼 먹을 순 없었죠. (<중국지>는) 진실에 부합하는 책으로 가는 초벌구이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이런 한계에도 ‘1차 자료 정리’가 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 그는 자료를 보다 “깜짝 놀랐던” 순간도 소개했다. “문화혁명 초기에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인민해방군 ‘대부’ 주더를 끌어와 청문회를 엽니다. 청문 내용엔 혁명 선·후배의 정리와 전우애는 없고 ‘1인 권력’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 경쟁만 보여요. 인생과 권력에 대한 비애와 무상을 느꼈어요.”

현 이사는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현대경제신문>(<한국경제신문> 전신)에서 쫓겨난 해직 언론인이다. 그 뒤 월간지 <마이카> 편집장을 거쳐 한국원자력연구소와 한국전력에서 홍보 일을 하다 88년 <한겨레> 창간 때 민권사회부 기자로 참여했다. 그가 <한겨레> 창간호(5월15일치 3면)에 쓴 기사(‘고문 없는 나라에 살고 싶다’)는 지금도 ‘언론인 현이섭’의 자부심이다. <한겨레>에서 민권사회부장, 출판국장을 지냈고, 신문사를 떠난 뒤에는 <미디어오늘> 대표로 일했다.

그는 중국을 15회 이상 다녀왔을 정도로 이 나라에 관심이 많다. 허룽의 제2장정 코스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5천미터가 넘는 티베트 고산을 오르기도 했다. “초등생 때부터 중국의 4대 기서(<삼국지연의>, <수호기>, <서유기>, <금병매>)를 탐독했어요. 해직 기자 시절엔 <삼국지>와 <수호지>를 원어로 봐야겠다고 맘먹고 중국어 공부에 매달렸죠. 틈만 나면 서울의 중국대사관 앞 헌책방을 뒤졌죠.”

왜 중국이었을까? “중국은 우리 이웃 대국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중국에 열등의식이 있어요. 중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중국혁명도 관심을 끌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장제스는 도저히 질 수 없는 게임을 졌어요. 마오쩌둥이 어떻게 민중을 설득하고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만들어갔는지 그 이면의 과정이 궁금했죠.”

<중국지>의 많은 사료는 당시 중국 매체들이 생산한 것이다. 그는 또 중국 공산당이 통제하는 언론사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 “중국혁명 시기의 언론은 선전의 도구였어요. 나라를 이렇게 끌어가겠다고 인민을 설득하는 도구로 활용했죠. 그것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집권 뒤에도 언론을 국민에 대한 계몽주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하고 있어요. 언론의 본질을 베어버린 것이죠.”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도 맡고 있는 현 이사는 중국의 모습에서 지난 9년 한국 언론의 현실을 떠올렸다. “언론을 통치 수단으로만 보았다는 점에서 지금 중국과 비슷해요. 공영방송의 ‘낙하산 경영진’이 징계권을 남용해 자사의 주축이 될 좋은 인재들을 내몰았어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김경호 선임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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