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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왜냐면] 칼럼 ‘서사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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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

<한겨레> 6월22일치 박권일 칼럼 ‘서사과잉: 조기숙 씨의 경우’에 반론한다. 박씨의 비판은 내게 성찰의 기회를 주었기에 감사의 뜻을 먼저 전한다. 다만, <한겨레>를 아끼는 주주로서 지면 편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독자와 공유하고 싶다.

“외부 필진의 의견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는 무관하다”는 변명은 듣고 싶지 않다. 필진을 정하고 원고를 교정하는 과정에서 신문사의 입장이 반영된다는 걸 나는 이미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헌재 결정이 대법원 선고 전에 이루어졌다면 유죄 선고가 어려웠을 텐데 부당하게 처벌받은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행위를 진보언론이 마녀사냥할 때 일이다. 선거전략을 위해 곽 교육감을 버려야 한다며 (나를 포함해) 그를 옹호한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한 당시 한 변호사의 칼럼에 반론한 적이 있다. 사측은 필자를 보호하고 싶다며 내 반론문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나도 신문사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필자나 칼럼 제목을 밝히지 않은 채 반론 아닌 반론을 썼다. 이번 박씨 칼럼의 제목에 정치인도 아닌 교수 이름을 거명한 건 당혹스러운 느낌을 감추기 어렵다.

박씨는 <한겨레> 3월30일치 ‘안철수씨의 건투를 빈다’는 칼럼에서는 팬클럽 카페에 올리기에도 민망한 희망사항으로 정치칼럼을 썼다. 안철수 후보가 패함으로써 박씨의 기대는 물거품으로 끝났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그런 필진은 당분간 절필하는 게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스스로 저널리스트를 자처하는 사람이 판타지로 쓴 정치칼럼을 게재한 언론사에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애정이 깊었던 만큼 실망도 컸다.

나는 평생 사실(데이터)과 논리에 기초한 글쓰기를 업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왕따의 정치학>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 글도 국내외 저명학술지에 게재된 수많은 다른 학자와 내 논문의 결과에 기초한다. 그런데 박씨는 내가 “사실에 바탕해서 서사를 엮어내는 게 아니라, 서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사실을 욱여넣는다”고 주장했다. 정치학 분야 저명학술지 전부를 모욕하는 발언이다.

이런 엄청난 주장의 증거로 제시한 게 고작 트위트 하나다. 박씨가 인용한 트위트에는 “심상정에 이은 김종대의 유승민 지지, 혼란스러우신가요? 민주당과 정의당은 연대 가능성 있는 경쟁관계일 뿐입니다”가 생략되어 있다. 정의당을 원망하는 민주당 지지자를 달래기 위해 한 말이다. 구좌파와 보수는 권위주의 문화로 통한다. 구좌파를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다 배신당했다며 화내지 말고, 원래 다른 편이니 공동의 이익을 위해 연대하기 위해 감정의 골이 깊어지지 않게 선을 넘는 발언을 삼가자는 호소였다. 민노당 지지자가 이명박을 더 찍었다는 트위트에 대한 경험적 증거는 당시 페이스북에 밝힌 바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진보언론에 대한 필자의 비판 또한 연구 결과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을 시민과 공유한 이유를 <왕따의 정치학>에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진보언론과 친노는 서로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다. 그런데도 상대편으로 인해 서로가 상처받았다. 양쪽 모두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가 된 것이다. 그저 침묵하기보다는 해소되지 않은 갈등을 드러내 현실화하고 싶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터놓고 이야기해보고, 다름을 인정하고 손잡고 싶어서였다.”

필자는 신좌파는 좋고 구좌파는 나쁘다는 가치판단을 한 적이 없다. 그건 철학의 영역이므로, 과학을 하는 필자로서는 양자가 이념적, 문화적 차이가 있음을 밝혔을 뿐이다. 차이를 알아야 어떻게 손을 잡을지 해답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베와 친노가 같다”고 발언한 허지웅씨에게도 명백한 사과를 요구하기보다는 실수를 인정하는 제스처만 보여도 사과로 인정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구좌파는 권위주의 문화로 인해 자신의 오류 인정이 쉽지 않다는 분석을 통해 얻은 해법이다.

허지웅씨가 사과하지 않으면 시민블랙리스트에 넣자는 발언이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은 일이라면 친일인명사전이나 낙천·낙선자 명단도 반민주적인지, 선진 민주국에서 일베 같은 집단을 허용하는 나라가 있는지 묻고 싶다.

누군가 “박권일은 일베와 같다”고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국회에 계류 중인 ‘혐오발언처벌법’을 하루빨리 통과시키자고 주장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정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의 자유는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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