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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금)

[기자의 시각] 흔들리는 사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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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조백건 사회부 기자


전국의 판사 대표 100명이 지난 19일 경기도 고양시 사법연수원에 모였다. 이른바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전국의 법원에서 뽑힌 대표들이 이날 이곳에서 10시간 가까이 회의를 가졌다. 이번과 같은 전국 단위의 법관회의가 열린 것은 2009년 이후 8년 만이다.

이날 회의는 철통 보안 속에서 진행됐다. 100명의 명단도 비밀에 부쳤다. 회의가 열린 3층 복도 입구엔 양쪽에 쇠막대를 세운 뒤 빨강색 줄을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복도 바닥에는 '넘어오지 말라'는 뜻의 녹색 테이프를 붙였고, 방호원이 버티고 서 있었다.

회의 시작 전엔 이곳을 찾은 법원행정처 판사 2명의 참관을 허용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두 판사는 동료 판사들의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밖에서 대기했다. 사법부 인사(人事)와 행정 전반을 관할하는 법원행정처에 대한 법관회의 참석 판사들의 불신과 불만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하게 했다.

이번 법관회의가 열리게 된 빌미는 법원행정처가 제공했다. 법원행정처 간부가 올해 초 판사들의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추진한 '대법원장 인사권 제한'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축소하라는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법관회의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조선일보

19일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각급 법원의 대표 판사들이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하고 있다. 전국 법원에서 선정한 판사 '대표자' 100여명은 이날 사법연수원에서 사법개혁 방안 등을 논의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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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회의에선 '계급장을 뗀 토론'이 이뤄졌다고 한다. 이 회의의 공보 담당 판사는 "법원장, 부장 같은 호칭을 빼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격의 없이 토론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실제 회의에 참석했던 몇몇 판사들은 다른 얘기를 했다. "회의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중립적인 제안을 하면 집단적인 공격이 이어져서 발언하고 싶은 의욕을 꺾었다"고 했다. '판사 대표' 100명 가운데 40명가량이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다. 회의 의장을 맡은 이성복 수원지법 부장판사, 의장을 보좌하는 간사 4명 중 3명도 이 모임 소속이다.

삼엄한 보안과 10시간 가까운 토론의 결과치고 밖으로 내놓은 회의의 결론은 짤막했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재조사하고, 법관대표회의 상설화 등을 의결했다는 게 골자였다. 그러나 이 발표는 곧바로 논란을 불렀다. 법관회의 측이 주장하는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조사를 맡게 된 소위원회 위원 5명 중 4명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이다.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두 축이 법원행정처와 국제인권법연구회다. 그런데 사건의 당사자가 사건 조사를 맡겠다고 나선 모양새가 됐다. 판사들이 법적 근거도 없는 법관회의를 상설화하겠다고 나선 것을 놓고도 뒷말이 무성하다.

다음 날인 20일 법원 내부 게시판에는 "연구회 회원들이 조사를 맡은 것은 공정성 시비를 살 수 있다" "특정 모임 회원들이 사법부를 마음대로 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판사들의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이번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안팎의 바람에 '흔들리는 사법부'의 실정만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백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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